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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忙中日記 2008.09.11 14:17
 아버지, 지팡이가 되셨다. 꼬부랑이 되셨다. 얼굴엔 세월의 깊디깊은 밭고랑이 생겼고, 앙상한 뼈마디엔 찬바람이 몰아친다. 창백한 햇살이다. 얼마 전에는 당뇨까지 생겨 잔혹한 하루하루와 싸우고 있다. 화가 나시면 두 눈에 불꽃이 튀시던, 그 강골의 아버지가 약골이 됐다. 너무나 무서워 반항할 수도 없었던 학창시절. 밭고랑으로, 야산으로 줄행랑치던 아들이었기에 그 속절없는 꺾임에 더 눈물이 난다. 십 오리 길을 자전거를 타고 다녀야 했기에 우리 집엔 자전거가 세대였다. 나와 형, 아버지는 시쳇말로 ‘잔차맨(자전차맨)’이었다. 아버지는 자전거 체인이 엉키거나, 펑크가 나거나, 고장이 났을 때 기술자처럼, 아니 귀신처럼 고쳤다. 10여 년을 통학하면서 자전거포에 간 기억이 없다.

 
지금 내게도 자전거 두 대가 있다. 그 자전거를 이제 내가 고치고 있다. 그 독한 아버지 대신 내가 두 아들의 체인을 고치고 있다. 말수가 적었던 나에게 입에 곰팡이 나겠다고 다그치시던 아버지처럼 내가 아이들에게 대화를 독촉하고 있다. 편식을 탓하던 아버지처럼 나도 아들의 편식을 나무라고 있다. 커서는 아버지처럼 잔소리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나도 아버지를 닮아가고 있다. 무서운 피다.


 지금 창밖엔 적갈색의 단풍이 겨울 길목서 가볍게 몸서리치고 있다. 저 단풍을 보며 아버지를 떠올린다. 저 낙엽을 보며 인생을 생각한다.
단풍은 나무와 잎이 이별하는 것이다. 곧 사라질 것들이 남기고 가는 마지막 선물이다. 모든 걸 떠나보내고 쓸쓸해진다. 하루 25km 남하하는 단풍. 그 단풍처럼 색 바랜 아버지, 낙엽처럼 쓸쓸한 노년의 아버지, 저 빛바랜 낙엽처럼 노쇠한 아버지를 보며 난 뒤돌아 운다. 어쩌면 그렇게도 마른 낙엽을 닮았는지. 너무나 강해 쓰러지지 않을 것 같은 아버지의 쓰러짐을 보며 아무도 모르게, 들키지 않도록 속절없이 운다. 내 눈물을 아들은 모를 것이다. 그러나 내 나이가 되면 아들도 나의 눈물을 이해하게 될 것이고 그도 울 것이다.


 고등학교 때 젊은 객기로 돈도 없이 술을 진탕 먹고 아버지께 술값을 받으러 간 적이 있었다. 그때 아버지는 아무 말도, 아무 제재도 없이 선뜻 술값을 내 주셨다. 학생이 무슨 술이냐고, 그것도 공술을 먹고 다니느냐고 몽둥이 찜질을 해도 시원찮을 판에 아버지는 장롱서 꼬깃꼬깃한 돈을 내주셨다. 오히려 그 묵언이, 무폭력이 질풍노도의 소년에게는 더 무서운 가르침이었다.


어느새 나도 아버지의 불혹을 맞았다. 또래의 어린 손자를 잃어버린 할아버지가 부모들도 포기한 어린 핏줄을 찾기 위해 엿장수가 되었다는 얘기가 이제는 아프게 박힌다. 그 엿가락 소리는 할아버지의 절규다. 나보다 29번의 겨울과 29번의 봄을 더 보낸 아버지. 시지푸스의 노동처럼 그 끝없는 세월을 노동으로 산 아버지. 남들 아버지처럼 달마다
누런 월급봉투를 가지고 나타난 적이 없는 블루칼라였지만 자식을 화이트칼라로 만들기 위해 헌신한 아버지, 고맙습니다. 오래오래 사소서.

Posted by 나재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