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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0.06 사노라면...낙향을 꿈꾸며 (4)
  2. 2009.07.06 피는 못속여...代이은 편집자들'


아래 글은 한국언론재단 '신문과 방송' 책자 10월호에 실린 저의 기고입니다. 언제나 낙향다운 낙향을 그리는 한 인간의 씁쓸한  여정의 기록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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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나리봇짐을 꾸렸다. 8년간의 서울생활, 13년간의 편집기자 생활을 정리하는 의미였다. 김삿갓은 하나의 로망이었고 그 방랑벽을 고스란히 떠안고 낙향을 결심한 것이다.
수 백 만장의 텍스트를 읽고 또 읽었던 직업이었는데 달랑 A4용지 한 장으로 수속을 마쳤다.

신문기자로 산다는 것은 고행이었다. 샛길로 빠질 여유조차 없이 앞만 보고 달리다보니 이직의 꿈이 항상 보푸라기처럼 일었다. 술과 일과 피로 속에서 하루하루 근심의 나이테만 켜켜이 쌓여갔다. 매년 쭉쭉 오르는 연봉에 신바람이 났지만 시시때때로 배반의 장미에 찔려 눈물 흘리는 나약한 인간 군상을 느끼며 몸 안에 찬바람이 불었다.

그러다보니 직장을 7번이나 옮기는 콤플렉스가 생겼다. 성실성이 부족하다거나, 충성도가 떨어져 이직을 반복한 것은 아니다. 직장의 제1조건이 ‘돈’이 아님을 알았을 때, 능력을 인정해주지 않고 ‘정(情)’을 방관할 때 직장은 ‘머슴’에 준하는 인력시장일 뿐이었다.

연간 휴일 140일, 하루 8시간 근무, 전 직원 해외여행, 전 직원 정규직, 육아휴직 최대 9년, 60세 정년보장은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신의와 비전을 바랬다. 신(神)의 직장을 원한 것이 아닌데 회사는 ‘신(辛)의 직장’으로 칼날을 곧추세웠다. 가로 39.4㎝ 세로 54.5㎝의 지면에 바친 청춘은 중년의 비포장도로로 접어들면서 스러져갔다. 가끔은 빗물에 눈물을 감추며 달렸다. 낙향은 그래서 탈출구이자 비상구였다.

세상살이에 구토하고 비토하고, 아파한 기억들이 고향 땅에 내려앉았다. 봄이면 매화꽃과 살구꽃이 흐북하게 피어나던 고향. 적당한 욕망이 있고, 청승맞은 밤에게 술잔을 건넬 수 있는 고향. 고향에선 토악질도 편하고 배설도 편했다. 내가 아프고 힘들고 ‘술이 필요할 만큼’ 외로울 때 달려와 술이 되고 말이 되고 어깨동무가 되어주는 고향.

그러나 낙향한지 얼마 후 난 다시 고향의 신문사를 기웃거리게 됐다. 활어시장 같은 편집국이 생각났던 것이다. 펄떡펄떡 뛰는 생선의 오르가슴을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잉크냄새 폴폴 풍기며 윤전기가 돌아가는 그 전쟁터를 떠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싱싱함을 잊을 수 없어서 수 일 동안 술독에 빠져 살다가 지방 신문사에 다시 들어갔다.

신문사는 여전히 정글의 전사를 키우고 있었다. 특별하다는 오만 속에 맨주먹 정신을 가르치고, 술 냄새와 인간의 냄새가 오묘하게 합쳐진 그로테스크한 곳. 콘크리트 세상을 벗어나 맨발로 뛰고 싶었지만 다시 콘크리트였다. 늘 마음이 뻥 뚫려 있었는데 고향에서도 천공(穿孔)이 났다. 본래 있었어야 할 작은 파편이 제대로 와 박힌 듯이. 그러나 편해졌다. 분노와 미움으로 점철된 치열한 ‘삶의 체험현장’이 끝나서인지 편해졌다. 맹수의 살기가 사라져 편해졌다. 샹그릴라(shangri-la)는 아니지만 여전히 ‘잃어버린 지평선’을 찾아 헤매는 꿈이 있었다. 그리고 내가 열애한 신문편집을 다시 하게 돼 행복했다.

고액연봉자로 꽤 산듯한데 지금도 빚 빼면 서까래 하나 남는다. 여전히 가난하다. 그러나 척박한 환경이더라도 마음속에 나무 몇 그루 심어놓고 산다. 달콤한 수액을 주는 대신 다른 벌레들이 꼬이는 것을 막는 벚나무, 모기가 들끓지 않도록 해주는 산초나무, 우물가에 심었다가 그 잎을 물위에 띄워 나그네의 물갈이를 막아준 버드나무, 먼 길을 떠나는 나그네를 위해 오리(2㎞)마다 심은 오리나무, 옛 시골집 길손에게 뒷간 가는 길을 알려주었다는 감나무, 일을 돕기 위해 처가에 온 사위의 지게를 가볍게 하기 위해 약한 덩굴로 질빵을 매줬다는데서 이름 붙은 사위질빵나무 등을 키우면서 말이다.

그리고 염원한다. 16년차를 향해 내달리고 있는 ‘지금’을 떠나 낙향다운 낙향을 언젠가는 하리라고. 텃밭에 고추며 오이며 토마토 등 채소들을 기르고, 사계절동안 여러가지 입성을 갈아입는 초록을 즐기며, 도시서 놀러온 지우(知友)들에게 햇살 같은 자연을 선물할 수 있는 그곳으로 가리라고. 비루먹을 상념이 폐선의 갑판처럼 삐걱대더라도 ‘나’를 내려놓을 수 있는 진정한 고향으로 가겠노라고.

해바라기는 태양의 궤적을 따라 동에서 서로 꽃을 움직인다. 더 놀라운 것은 암실에서도 해바라기는 빛이 있는 곳에서 그랬던 것처럼 동에서 서로 꽃을 움직인다. 빛을 쫓는 습성이 몸에 배어 있기 때문이다. 나 또한 ‘습성’대로 살았다. 세상이 다 그런 줄 알고 ‘버릇’처럼 살았다. 그러나 이제 나를 감싸고 있었던 ‘무거운 갑옷’을 벗어놓는다. 세상이 아무리 날 흔들어대도 무소의 뿔처럼 내 길을 가기 위해서.

Posted by 나재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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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아라누리 2009.10.06 12: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잘보고 갑니다. 멋진 꿈을 꾸고 계시군요.

  2. ㄱ ㅅ 2009.10.06 13: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감사합니다. 꿈을 갖고 있지만 그 꿈이 빨리 오지 않네요. ㅠㅠ

  3. BlogIcon 꼬치 2009.10.06 17: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돌아갈 고향을 꿈꿀수 있다는 것 또한
    부러운 이가 있다는 사실 잊지마세요.

    인생이란 녀석이 본디 달콤쌉싸름과잖아요
    달콤했던 순간이 언제인지 싶기도 하지만
    그 순간에 대한 기막힌 추억때문에
    쌉싸름을 견디게 만드는....

    황지우 싯귀처럼 '늙어서 편해진 가죽부대'에
    덧없는 세월만큼의 나이테가 자연스러워질수록
    흙냄새와 나무향기에 대한 꿈이 쌓여갈수록
    마음이 둥글둥글해지는것 같아요.
    무뎌지는것 같기도 하고....

  4. ㅠㅠ 2009.10.06 19: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늙어서 편해진 가죽부대...
    참으로 멋진 말이네요..
    더 늙기 전에....용기가 더 사라지기 전에....
    꿈을 이루었으면....

아래 글은 편집기자협회보에 실었던 글이다.

스페인=2008년도 한국편집대상 수상자와 가족들

'피는 못 속인다' 코드 함께 하며 '業'대물림
 부전자전(父傳子傳), 부전여전(父傳女傳), 왈형왈제(曰兄曰弟)라.

 그 아버지에 그 아들, 딸, 형제가 있다. 이들은 피를 나눈 ‘피로 한’ 사이로 절대 ‘필요한’ 관계이기도 하다. 부모는 자식을 기르면서 수많은 삶의 ‘생몰(生沒)’을 가르친다. 때로는 대장간의 ‘장이’로, 때로는 문화예술계의 ‘쟁이’로, 때로는 생업의 진정한 ‘꾼’으로 키우기도 한다. 자식에게 업(業)을 대물림하기도 하고 재(財)를 남기기도 한다. 농사든, 공사든, 회사든 인생을 공유한다. 그러나 재물의 대물림은 가통에 큰 ‘업적’이 되지 않는다. 때문에 재(財)보다는 평판이 좋은 업(業)을 대물림하는 것을 ‘가문의 영광’으로 여긴다.

 지는 않지만 편집기자 중에도 부자·부녀지간, 형제지간에 대 이은 사람들이 있다. 아직까지는 그 수가 적어 발굴하기조차 힘든 게 사실이지만 업(業)을 이은 편집기자라는 데 그 희소가치가 있다. 이는 ‘훌륭한 선배 밑에 우수한 편집기자가 나온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이배영-이대영, 구자익-구자건 兄弟, 노기창-노수옥(현재 일간스포츠) 父女, 임현태-임훈구(현재 스포츠투데이)·김창규-김진성(스포츠투데이)·오양동-오필승 父子 등이 있는데 이들은 대 이은 장인정신으로 롱런한 사람들이다. 아버지가 국장이고 사부이고, 형제가 대부(代父)이고 데스크인 셈이다. 이들의 장점은 농사꾼이 아들 농사꾼에게 진정한 ‘꾼’이 되는 길을 가르치듯 업무에 있어서도 좋은 반려자가 된다는 점이다. 물론 ‘피는 못 속여’ 한쪽이 이름을 날리면 다른 한쪽도 자연스럽게 명편집의 정도를 걷기도 한다. 편집은 숙련과 정련의 고도화된 지식을 필요로 하기에 적당한 ‘훈수’에 깨우침을 얻는 경우도 많다. 이들은 이런 자연스런 ‘혜택’을 받아 명편집자의 길을 좀더 ‘여유롭게’ 가기도 한다. 구자익-구자건, 이대영-이배영은 대표적인 편집 형제다.(천상기 씨의 ‘한국편집기자열전’ 참조)

 구자익 씨는 경향, 조선일보, 신아일보 편집기자, 중앙일보, 한국일보, 일간스포츠 편집부장을 지냈다. ‘쟁이’이기를 자원하고 그 길로 가려는 이들에게 좋은 안내자였다. 훗날 ‘구자익 편집캠프’라는 말까지 나왔다. 편집에 혼을 쏟아 부었던 외곬의 편집장인이었다. 이런 형을 둔 구자건 씨는 1971년 서울신문 수습16기로 언론계에 첫발을 내딛었는데 독특한 편집스타일로 이름을 날리던 친형의 영향을 받아 발 빠른 성장을 보였다. 편집가정교사를 한지붕 아래 모시고 있는 셈인지라 탄탄한 편집기초를 다질 수 있었다. 그는 경향신문 편집부장, 민주일보 편집국장 등을 지냈으며 현재는 문화일보 편집위원으로 근무중이다. 형제가 편집외길을 걸어온 경우는 흔치 않으나 두 사람 모두 같은 신문에서 편집데스크로 지면개혁을 선도한 점은 특기할만하다. 

 또 다른 편집형제인 이대영-이배영 형제는 편집 외길 4반세기를 보낸 이들이다. 이대영 씨는 취재기자로 활약 하던 중 편집기자로 뛰고 있던 친형 이배영 씨의 영향으로 편집기자쪽으로 전향했다는 설이 있다. 이들은 70년대 경향과 대한일보에서 진취적인 편집스타일로 경쟁을 펼쳤다. 이들의 편집 명작들은 형제지간 대화를 통해 편집의 이론과 실무를 공유한 결과라는 분석이다. 형 이배영 씨는 경남일보, 대한일보, 중앙일보, 세계일보 편집부장, 제일경제 편집국장 1976년 한국편집기자협회 부회장을 지냈으며, 동생 이대영 씨는 경향신문, 국민일보 편집부장, 편집부국장 등을 역임하고 현재는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심의실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임현태-임훈구 스포츠투데이 기자는 편집父子다. 임현태 씨는 신아일보, 경향신문의 편집 배구스타였다. 대회 때마다 맹활약을 펼쳐 몇 번의 우승을 차지했고 MVP도 독차지했다. 편집도 수준급에 이르고 배구도 잘하는 기자로 알려져 스카우트 대상이 되기도 했다. 경향신문, 주간경향 등에서 26년여간 언론계에 투신했다.

 또 다른 편집父子로는 김창규-김진성 스포츠투데이 기자. 김창규 씨는 수도권 지방지 창간의 대부라는 닉네임을 가지고 있다. 서울신문, 조선일보, 한국일보 등에서 그만의 독특한 편집스타일을 구축했다. 24년간에 걸쳐 3개 일간지에서 편집 외길을 걸었다.

 오필승 씨는 매일경제신문, 스포츠서울, 스포츠조선, 스포츠투데이. 스포츠신문 전문 편집자로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았다. 빛깔 다른 화려한 테크닉 잔치를 지면에 반영했다는 평가도 듣고 있다. 그의 부친은 오양동 씨다. 노수옥 기자(일간스포츠)의 부친인 노기창 씨는 1973년 한국일보에 입사해서 1978년까지 5년 간 편집부에 근무하다가 사회부로 발령난 뒤 편집에 소질이 있다는 이유로 2년 뒤에 다시 편집부로 복귀, 총 8년 6개월 정도 생활했다. 노수옥 기자는 “신문사 공채의 교과서는 신문이다. 신문을 1면부터 끝면까지 꼼꼼히 보고 그 중에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메모했다 나중에 찾아보라는 가르침에 신문을 정독하는 버릇이 생겼고 지금의 나를 만들게 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됐다”고 술회했다.

  언론계 원로인 K씨는 “부모와 자식의 세대는 보수와 진보, 아날로그와 디지털, 비문화와 문화, 좌익과 우익, 민주와 반민주, 호남과 영남과 같은 갈등으로 양분되는 듯하지만 그 괘는 항상 같이한다”며 “코드가 같다는 것, 삶의 지향점이 같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남들이 돌아갈 때 단걸음에 뛸 수 있는 탄력성이 장점”이라고 父子·兄弟 편집기자 예찬론을 펼친다.

  父子 편집기자는 富者다. 兄弟 편집기자는 용감하다. ‘핏줄의 힘’을 공유해 큰 힘으로 부활시키는 대물림, 형제에게 있는 끼를 나누어 120% 발휘하는 ‘나눔의 힘’이야말로 멋진 편집, 멋진 편집기자가 되는 일타이득의 효과가 있다. 아직까지는 편집사에 미미하게 남아있는 ‘편집형제, 편집부자, 편집부녀’의 기록이 앞으로 더더욱 많아지기를 기대해본다. 

Posted by 나재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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