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글은 64세 때 어머니가 쓴 일기를 몰래 베껴놓은 것이다. “세월의 징검다리를 건너가는 시간의 발자국 소리. 성큼성큼 딛고 가는 이 한줄기 길 위에서 우리네 삶은 가련하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다 가기 전에 알찬 일들을 해야 할 텐데. 한없이 푸른 잎새처럼 너울거리고 싶다. 아지랑이 숨결 속에 새 숨이 돋아나듯 나의 생명력도 그러할 수만 있다면 좋을텐데…. 자식들의 등불이 되고프다. 단단하고 강인한 땅을 뚫고 뾰족이 솟아나고 있는 새싹들이여 푸름을 뽐내지 마라. 나에게도 내 무거운 짐을 덜어주는 새싹 같은 자식이 있다. 1997년 1월 1일. 35년 만에 노동을 끝냈다. 몸에 병이 들어 농사는 실패했지만 자식농사는 잘 지었다고 생각한다. 자식 때문에 울고 웃었지만 오로지 자식 때문에 살아왔다. 내 몸에는 오로지 자식 밖에 없다.”
▶영화 '친정엄마'가 국민을 울리고 있다. 영화 속 엄마는 '무식하고 시끄럽고 촌스럽고 그래도 나만 보면 웃는' 엄마다. 그래서 '친정엄마'는 '엄마'보다 짠하다. 결혼한 여자들에게 '친정엄마'는 거리상으로는 떨어져 있지만 항상 의지할 수 있는 그림자 같은 존재다. 영화 속 딸은 아빠가 숨지자 혼자 살 엄마를 걱정해 ‘서울 와서 함께 살자’고 한다. 그때 엄마는 “너랑 같이 살면 네가 힘들 때 갈 데가 없잖아. 엄마는 여기 있을 테니까 힘들면 언제든지 찾아와"라고 한다. 500원어치의 콩나물을 사면서 단돈 100원을 아끼기 위해 극성을 부리는 친정엄마의 모습은 우리들의 어머니와 닮았다. 나 또한 영화를 보는 내내 열 번 넘게 울었다. 구멍이 뚫린 곳이라면 그 틈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남자에게도 엄마는 친정엄마다.
▶눈물은 후회다. 뭐든지 후회하기 때문에 눈물이 나는 것이다. 어머니라는 단어만 나와도 온 몸이 우는데, 자식 때문에 수없이 울었을 어머니 때문에 운다. 소리내어 운다. 남몰래 울기에는 어머니의 아득한 깊이를 헤아리지 못했기에 소리 내어 운다. '천금같은 내 새끼'로 살아 온 뻔뻔함 때문에 운다. 어머니는 나를 향해 외롭다고 비명을 질렀지만 나는 듣지 못했다. 콩나물 값을 깎는 엄마를 부끄러워하며 살았다. 배앓이를 할 때마다 어머니 손길을 기억하는 우리는 소중한 사람들을 너무도 가벼이 여기며 살았다. 지난해 5월 암으로 세상을 뜬 고(故) 장영희 교수는 어머니에게 마지막 편지를 썼다. ‘엄마 미안해. 이렇게 엄마보다 먼저 떠나게 돼서. 내가 먼저 가 아버지 찾아서 기다리고 있을게. 엄마 딸로 태어나서 지지리 속도 썩였는데. 그래도 난 엄마 딸이라서 참 좋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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