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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9.11 탈옥을 꿈꾸는 감옥살이는 행복했다



세월은 흘러가더라

그렇게 흘러가더라

종이만큼의 질량으로 버텨온 펜의 노래.

공백을 메우는 것이 여백임을 알았을 때

바람처럼, 뜬구름처럼 살아온 지난 날이 미워

저당 잡힌 밤을 안주삼아

만원어치의 울홧술을 마시고 천원어치의 비애를 배설했다.

그 젊은 날의 객기(編輯症)로 얻은 것은

24개의 주름과 10kg의 살과

9490개의 술병과 플라시보 같은 중병.

30만 5005개의 탈모, 0번의 연애이력, 780번의 야근,

427050장의 종이(gera), 16235장의 신문 쪼가리였다.

지독한 출산을 위한 표독한 합궁.

그렇게 봄여름가을겨울은 가더라.

그렇게 겨울가을여름봄은 오더라.



여백위에 핀 꽃은 저승꽃이 되었다가도

가끔은 행간 속에서 웃음꽃으로 피고 졌다.

가로 39.4cm 세로 54.5cm, 가로 7단에 세로 15단.

미추한 헤드라인은 데드라인을 거치며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경쟁 속에 미아처럼 버려졌다.

규격화된 방안(지면)에서 배식(밸류 측정)을 하고

요리(레이아웃)을 하고

메뉴판(제목)을 거는 지루하고도 달콤한 옥살이.

그게 바로 (편집쟁이의 체온) 36.5도로 만든 365일의 일상이었다.



세상은 보기보다 참혹하더라.

지면은 생각보다 참혹하더라.

울화통 나는 세상에서 울화병을 얻었고

천식 나는 지면에서 고뿔을 앓았다.

나라는 이름으로, 羅라는 이름으로

너의 이야기를, 너의 언어를 읊조리며

7번의 이직과 2번의 폐간을 당했다.

그렇게 윤회한 삶은 슬프지 않았다.

그렇게 변덕스러운 삶은 아프지 않았다.

業으로 하지 않고 樂으로 일했으니 하늘이 도왔다.



첫새벽은 아침을 깨우고 아침은 낮을 향해 질주한다.

나도 질주한다. 한낮의 허허벌판 지면속으로 질주한다.

걷고 또 걷고 청춘의 고개를 넘어 중년의 비포장도로로 달려간다.

가끔은 눈물로, 가끔은 빗물에 눈물을 감추며 달린다.

내 심장의 박동을 요동치게 하는 편집.

그 정교하고도 무서운 삶의 감옥.

하루에도 수십 번 알카트라즈의 탈옥을 꿈꾸지만

한번도 쇠창살 너머 햇살을 만져보지도, 훔쳐보지도 못한

그 감옥.

밤바다 굿바이를 외치면서도 새벽에 맨발로 뛰어나가 배달신문을 보는

밤마다 탈옥을 외치면서도 아침엔 굿모닝을 외치는 미련한 에디터.



저 창살 너머 펄럭이는 햇살의 마력을 난 안다.

저 햇살 너머 숨어있는 희망의 창살을 난 믿는다.

나의 사랑스러운 감옥

나의 곤혹스러운 감옥,

아, 찬란한 슬픔의 수인(囚人)이여!

지금은 몰라도, 아직은 몰라도

나중에, 백발이 성성한 나이가 되었을 때

그 작은 감옥이, 큰 행복이었노라고 말하고 싶다.

정녕 후회없는 행복한 감옥이었노라고 말하고 싶다.

<편집기자협회보 게재>

Posted by 나재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