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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5.27 바람 타지 마세요. 바람 맞습니다
  2. 2009.08.27 의자왕이 남의 나라 사람인가?
27일 6.2지방선거 부재자 투표가 전국적으로 일제히 시작된 가운데 계룡시청에서 군인들이 투표를 하기위해 대기하고 있다.김호열 기자 kimhy@cctoday.co.kr

▶660년 여름. 당나라 소정방의 13만 대군은 북풍을 타고 금강 입구에 닿았고, 신라 김유신의 5만 군사는 지금의 대전과 옥천 사이인 탄현을 넘었다. 계백의 군사는 5000명이었다. 계백은 자신의 사병(私兵) 위주로 급조한 군대를 이끌고 황산벌에서 10대 1의 대결을 벌였다. 그런데도 계백은 다섯 번 싸워 네 번을 이겼다. 만약 양측의 군세가 동등한 수준이었다면 김유신은 계백을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당나라 소정방도 계백군이 전멸한 후에야 상륙했다. 계백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백제 땅을 밟지 못할 만큼 무서워했던 것이다. 여기에 ‘처자식 살해 후 출정설’도 신라 측에서 고의로 조작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어찌됐든 계백은 패장(敗將)이지만 역사에서 충절의 화신으로 남아있다.


▶연산군은 130편의 시를 남긴 예술인이다. 그러나 감정기복이 심해 법도를 무시하면서 충동적으로 행동했고, 신하들의 비판에 변명으로 일관하거나 화를 잘 냈다. 그러다보니 그의 광풍(狂風)에 참살 당하는 일이 잦았다. 이는 어린아이 때부터 애정결핍, 정서불안에 시달리고 왕이 돼서도 생존위협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이후 어머니의 비통한 죽음을 알게 된 후 극단적인 광기와 잔인성은 더욱 포악해졌다. 그러나 광풍은 오래가지 않았다. 반란군이 왕궁을 포위했을 때 신하들은 바깥 동정을 살핀다며 모두 수챗구멍으로 달아났다. 그 누구도 연산군을 위해 목숨을 바치지 않았다. 되레 새 왕인 중종에게 허리 굽혔다. 백성들도 울지 않았다. 세종과 정조 주위에 충신과 인재가 모여든 것은 그들이 운 좋게 시대를 잘 타고 나서가 아니라 1퍼센트 특권층이 아닌 절대다수 백성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를 했기 때문이다.


▶이케다(池田勇人)는 1960년부터 4년간 일본 총리를 지냈다. 그는 교토대학을 나와 지방의 세무서장을 전전하던 변두리 관료였다. 무엇보다 치명적인 약점은 파벌로 꾸려가는 일본식 정당 정치에 능숙하지 못하다는 점이었다. 단명으로 끝날 정권의 특색을 골고루 갖춘 셈이다. 그러나 요즘 일본정치사 교과서들은 하나같이 이케다 총리의 재임 시기를 ‘자민당 황금시대’로 기록했다. 정치적으로 허약한 이케다가 이 같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저자세(低姿勢) 정치' 때문이다. 그는 당내의 정적(政敵)과 경쟁자들에게 무조건 허리를 낮췄다. 야당에게도 마찬가지였고, 국민을 대할 때는 더 고개를 숙였다. 이케다는 정쟁할 시간에 국민소득 향상 정책에 힘을 쏟았다. 때문에 정권 4년 반 동안 일본은 고도성장을 이룩해 세계 제2경제대국이 됐다. 이케다의 ‘저자세’는 결국 정풍(整風)운동이었다.


▶광장을 가득 메웠던 촛불집회가 있은 지 2년이 지났다. 4개월 간 2398차례 집회에 100만 명(경찰 추산)이 참여했다. 이는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 이후 가장 큰 규모의 거리시위였다. 그러나 상처는 아물지 않고 있다. 무려 1000건이 넘는 법정 공방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뉴욕타임스의 니컬러스 크리스토프가 질문한다. “코미디 프로에서 아버지의 뺨을 때리라는 주문이 나왔다. 아버지도 허락했다. 당신 같으면 하겠는가? 때릴 수 있다면 당신은 좌파다. 도저히 못하겠다면 우파다.”

 지금 대한민국은 좌파, 우파가 뒤섞여 노풍, 북풍을 노리고 있다. 그러나 누가 우리 편인가. 바람을 일으켜 승자가 되려는 자들은 가짜다. 촛불을 이용해 바람을 일으키려는 자들은 허풍이다. 유권자여 명심하시라.
Posted by 나재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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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를 쓴 고려 문신 김부식은 신라 왕실의 후예다. 때문에 삼국사기에는 신라중심의 사관(史觀)이 고리타분하게 박혀있다. 사기에는 고구려의 멸망이 수·당나라에 대한 불순한 태도 때문이라며 중국 역성을 든다. 또한 백제가 전쟁을 일삼고 대국에 거짓말을 하는 죄를 지었다고 기록했다. 강대국의 비위를 거스를 염려가 있는 부분은 본기(本紀)에 적지 않거나 은유법으로 슬쩍 피했다. 광개토대왕이 대마도와 일본의 왜를 복속시키고 중국 요서지방으로 진출한 사실도 적지 않았다. 백제가 중국 동부지방으로 진출하고 대마도를 복속시킨 사실도 빼먹었다. 백제의 본기가 신라본기의 35%, 고구려 본기가 신라본기의 약 60%밖에 되지 않는다. 결국 김부식은 신라의 눈으로, 승자의 눈으로 역사서를 썼다. 어찌 보면 ‘왜곡’이었다.


▶660년 7월 13일 밤. 의자왕은 사비성을 빠져나와 웅진으로 몸을 피했다. 휘영청 밝은 달이 뜬 낙화암벽 백마강은 ‘눈물’로 출렁였다. 궁녀 3000여 명은 바위에서 ‘꽃처럼’ 떨어졌다. 끝내 포로가 된 의자왕은 태자 등 1만 2000여 명과 함께 당나라로 압송됐다. 그러나 나라 잃은 왕으로서의 번민과 슬픔, 자책 때문에 얼마 가지 않아 병사했고 이역만리 낙양 북망산에 묻혔다. 김부식은 백제의 멸망을 소홀히 취급했다. 백제와 고구려를 ‘적국’처럼 그리는가하면 김유신을 용장으로, 계백을 적장으로 은유했다. 당나라와 손잡은 문무왕은 통일을 완성한 ‘우리 편’으로, 의자왕은 사치와 향락에 빠진 ‘난봉’으로 기록했다. 그러나 신라의 삼국통일은 당나라 외세를 불러들여 이룩한 ‘불구의 합체’다. ‘충청·호남대통령’ 의자왕의 멸절(滅絶)과, 황산벌에서 계백이 대패했을 때 역사는 박수를 쳤다. 역사는 승자의 것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DJ)이 화해와 통합의 메시지를 남기고 영면했다. 그는 빈털터리 정치 낭인에서 대통령까지 지내며 굴곡 많은 생을 살았다.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향한 의지는 투옥과 연금, 망명의 고통을 딛고 인동초(忍冬草)처럼 피어올라 헌정사상 첫 수평적 정권교체와 해방 후 첫 남북정상회담이란 열매를 맺었다. 최대 국난이었던 외환위기를 극복했고 지역주의 타파에 헌신했다. DJ는 “훌륭한 대통령을 했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혼신의 노력을 다한 대통령으로 역사에 남을 것”이라고 했다. DJ의 정치역정은 승자로서가 아니라 ‘시대의 양심’을 지킨 의로운 자의 기록이다.


▶역사는 패자를 위해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역사는 절대다수 백성을 대변하기 보다는 1% 특권층 위주로 기록됐다. 지금 우리가 DJ를 기억하며 광주를 떠올리는 것은 ‘빛고을’에 대한 ‘빚’ 때문이다. 폭도로 몰고, 폭력을 행사한 유혈의 책임 때문이다. 그동안 역사는 승자에 의해 기록되고, 승자에 의해 변질됐다. 그러나 이제 역사는 승자의 것이 아니라 의로운 자들의 기록이다. 정부의 눈엔 여전히 ‘신라’가 아군처럼 보일지 모른다. 전라도, 경상도가 ‘화개장터’서 손을 잡지만 아직도 ‘친구’ 같아 보이진 않는다. 대통령이 ‘중도론’을 내세우며 서민의 손을 잡지만 어쩐지 ‘친근’해 보이진 않는다. 어설픈 절충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DJ가 숙제로 남긴 화해와 통합. 입만 살아서 친한 척 하는 이 시대 짧은 눈과 경박한 시대정서를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

Posted by 나재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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