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나무 한 그루.
텅 빈 육신에 삼투압을 하고 그 든든한 뿌리로 인해

비바람에도, 환절기에도 고뿔 앓지 않는,

육신의 뿌리는 세상 밖을 향해 뻗고

때론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쑥쑥 자라

마음의 두께마저 뚫어 웃자란다.

나무는 근육질의 나이테를 벗어나

섬약한 지성의 가지를 일깨우고

무지와 교만의 바이러스를 치유하는

손 페티스트(fetishism).

내가 껴입은 남루한 육체의 옷은

치명적 상처로 수차례 수액주사를 맞았다.

독살스러운 세상의 비수에 꽂혀

독 오른 뱀 대가리처럼 솟아오른

연리지(連理枝)를 부러워한다.

두 나무 한 몸.

홀로 자랄 공간도 모자란 데

언제 내 몸에 들어왔을까.

하나가 병들기 전에 한 몸으로 붙었으니

흰 꽃을 피웠으면 흰 꽃으로 피고

붉었다면 붉은 꽃으로 피어나네.

생장 멈추어도 다리 떼고 벗어나지 마.

밤새도록 비정한 벌목해도 도망치지 마.

내 안의 나무 한그루, 내 안의 남루한 수목원이여.


*연리지(連理枝) = 두 나무의 가지가 서로 맞닿아서 결이 서로 통한 것



☞집 앞에 있던 미루나무는 유년시절의 유일한 말동무였다. 10m가량 되는 미루나무를 힘겹게 올라가서는 Y자 가지에 타고 앉아 경치도 보고 나무와 팔푼이처럼 얘기도 나누고 책도 읽었다. 마음 비운 나무는 고개를 끄덕이듯 가지를 절레절레 흔들며 답례했다. 외딴 집 미루나무, 좀더 높은 곳에서 멀리 보고 싶은 욕망의 높이였던 것 같다. 처음엔 그 높이가 두려워 벌벌 떨기도 했지만 나중엔 원숭이 나무 오르듯 눈감고도 Y자 둔덕을 찾아냈다. 그런 고마운 친구에게 한번은 몹쓸 짓을 했다.

 "나무야, 외로워…. 외롭거든…."

 조각칼로 나무에 낙서를 한 것이다. 비정한 칼질을 했던 것이다. 아프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일년 후 그 나무 위에 다시 올라갔을 때 상처를 확인하고는 깊은 상심에 빠져버렸다. "나무야…"가 "ᄂᄆㅑ..."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그 상처 그대로 글자가 커버린 것이다. 흐릿했지만 마치 "야, 임마" 처럼 보였다. 그 후 그 나무에 오르지 못할 정도로 내 키가 커져버렸을 때 그제서야 후회를 했다. 그러나 후회는 곧 까맣게 탔다. 이미 그 나무는 상처를 안고 피고름을 짜내며 나이테를 몇 개나 더 만들었을 시간이 지났으니까. 나이가 들면서, 나무가 크면서, 그 곁을 지나면서 많은 시간동안 나무에게 사과해야만 했다. 이후 나무를 사랑하게 되었다. 나무를 좋아하는 것은 나무한테는 귀만 있지 입이 없는 까닭이다. 말이 없이 묵묵히 들어줄 뿐이다. 상처주지 않는 조용한 귀거래사. 한번 밑동이 잘린 나무는 이듬해 잘린 그루터기에서 많은 곁가지들이 내뻗친다. 그러나 그 곁가지가 자라서 다시 나무가 되는 법은 결코 없다. 그냥 곁가지 일뿐이다. 오히려 그 곁가지는 눈엣가시여서 전지가위로 싹을 잘라준다. 그래야 튼실한 하나의 가지가 더 굵고 튼튼하게 자라기 때문이다. ‘곁가지’란 말을 흔히들 쓰는 것도 무용지물에서 비롯됐으리라. 나무도 뿌리채 다른 곳으로 옮겨 심으면 한동안 몸살을 앓는다. 나무 옮기는 일도 예삿일이 아니다. 온 몸 가득 상처를 남긴다. 바람에 스치어도 상처가 남을진대 뿌리까지 건드리면서 이사 가는 일은 강풍에 휘둘리는 일이다.

과수원집 아들은 좋은 사과를 못 먹는다. 썩은 사과만 먹는다. 벌레 먹은 과일이 맛있다는 말은 사실이다. 꿀 먹은 과실에 벌레가 꼬이고 새가 꼬인다. 그 놈들은 아주 정확히 찾는다. 쪼아대며 찾아내기도 하지만 향기와 모양새만 봐도 단방에 좋은 과실을 찾아낸다. 그래서 더 얄밉다. 시원찮은 것을 먹으면 눈감아 줄진대 그들은 상품이 될만한 것들만 건드린다. 무서운 헌터다. 물론 김남주 시인처럼 ‘찬 서리/나무 끝을 나는 까치를 위해/홍시하나 남겨둘줄 아는/조선의 마음이여’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얄밉도록 생존의 씨알을 먹어버리는 놈들을 곱게 봐주기엔 먹고 살기가 빠듯하다. 때문에 비닐을 두르고 천을 두르고, 이제는 화약총과 새총에 폭죽, 엽사들까지 동원된다. 이러다간 대포까지 등장하지 말란 법은 없을 것이다.

나무와 바람은 친구다. 나무가 바람에 스치면 비 오는 소리가 들린다. 귀를 대고 소곤 되지 않아도 된다. 그냥 눈만 감으면 들린다. 아득한 곳으로부터 아주 가까운 곳으로 소리는 전율한다. 그 숲 소리, 그리고 그 나무들의 우듬지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보라. 나무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향기의 미묘한 흩날림 속에 소리는 깊어간다.
1온스의 장미향을 얻기 위해서는 1톤의 장미가 필요하듯 나무와 바람의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진득한 기다림이 필요하다. 나무와 바람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일년에 0.5센티미터씩 굵어지는 소나무의 깊은 앓이를 이해해야 한다. 소나무가 무게에 겨워 적설을 덜어내는 소리를 보고 남의 손을 이해해야 한다. 남의 손에 얹어있는 삶의 무게를 느껴야 한다. 남의 손이 지쳐 보일 때 손을 잡아 주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나무를 사랑하는 첫걸음이다.

대나무는 좀처럼 꽃이 피지 않지만 꽃이 필 경우에는 모든 대나무 밭에서 일제히 피어 대나무 스스로의 영양분을 모두 고갈시켜 말라죽어 간다고 한다. 거룩한 고갈, 무서운 소진이다. 대나무는 속이 텅 비어 하
루 여덟 자나 자랄 수 있다. 비울 수 있기에 채울 수 있는 것이다. 추웠던 겨울을 겪지 않은 나무가 봄볕의 고마움을 알리 없고, 고약한 거름까지도 나이테 깊은 곳까지 빨아들일 줄 모르는 나무가 생장할 리 없다. 어떠한 햇살도 절반은 응달이다.  응달을 이겨내야만 잘 자라는 법을 터득한다. 비바람이 불어도 한파가 몰아쳐도 그것을 이겨낼 그릇이 있어야 한다. 대나무의 '비움'은 고난을 받아들일 삼투압의 자세가 돼 있기 때문이다. 텅텅 공명통 소리를 내며 바람을 껴안고 바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들에게서 피리소리가 나는 것은 바람을 품었다는 신호다. 세상풍파를 견딜 수 있는 바람의 아들이기에 소리가 기운찬 것이다.
아, 바람맞는 나무여. 나무속의 바람이여.

Posted by 나재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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