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이야기

忙中日記 2008. 10. 18. 11:46


사진=연합뉴스  글=나재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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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은 야누스다. 술에 취하면 쥐처럼 깐죽깐죽 댄다. 소처럼 느릿느릿 굼벵이가 된다. 범처럼 객기를 부린다. 토끼처럼 약아진다. 용처럼 휘청휘청 댄다. 뱀처럼 느끼해진다. 말처럼 이리저리 뛴다. 양처럼 눈을 깜빡깜빡한다. 원숭이처럼 생쇼를 한다. 닭처럼 오리발을 내민다. 개처럼 개버릇이 나온다. 돼지처럼 먹성이 좋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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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슬픈 우상들은 무시로 술상에서 보냅니다. 이류 대폿집에서 일류 시인의 시집을 한쪽에 놓고 삼류사회의 기득권을 안주삼아 독주를 들이켜던 낭만은 사라졌지만. 비주류(非主流)속 주류인(酒流人)들의 애환을 들여다볼까요. 단, 술을 의인화했으니 '꾼'들은 유념하십시오. 저는 만인의 연인, 소주입니다. 그러나 만인의 적이기도 하지요. 왜냐하면 주인님들의 간을 붓게 하는 '간 큰' 녀석이기 때문이죠.
주인님, 올 연말은 '술술' 찾지 말고 '슬슬' 드십시오. 저도 연말에 보너스 정산이나 받아서 푹 쉬고 싶습니다. 웬만하면 참겠는데 너무 자주 러브콜을 하니 주5일 근무제가 무색해집니다. 뭐! 저야, 주인님의 구절양장으로 흘러들면 그만이지만 주인님의 아픈 간과 헐어버린 똥꼬, 둔해지는 IQ를 생각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올해 저는 주인님의 러브콜을 하루건너 한 번꼴로 받았습니다. 저의 원주인(술공장 사장과 술집 주인)이야 저 팔고 공병 팔아 돈만 챙기면 그만이지만 그래도 술상 앞에 앉은 불쌍한 우리 주인님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주인님, 어제도 엄청 드셨어요. '반죽 좋은' 오버맨을 만나 급기야 오바이트(over+eat)까지 했지요. 전봇대 아래 쏟아놓은 제 육신은 그야말로 주꾸미와 생선 대가리, 밀가루 반죽에 '곤죽'이 되고 육해공군 반찬, 파전에 '파김치'가 돼 처량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술 먹는 '꼬락서니'를 보면 저마저 '취하게' 합니다. 9이닝 내내 강소주 들이켜는 완봉 달인이 있죠, 대단합니다. 웬만하면 마운드에서 내려와야 하는데 똥고집이 장난이 아닙니다. '자타-타타 공인' 철인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요리를 잘한다는 거죠. 커브(옆으로 술잔 돌리기), 직구(1대1 맞짱), 체인지업(폭탄주), 투심패스트볼(차수 변경)로 변화를 주죠. 볼배합(주법)을 달리하고 시간텀으로 몸을 조절합니다. 그 노련한 피칭을 따라가는 약골들은 몇이닝 가지 않아 헛스윙에 녹초가 됩니다. 그러나 말이 완봉이지, 완투에 가깝다고 할 수 있어요. 9이닝 동안 던지다 보면 실점이 따르기 때문이죠. 두주불사하다 보니 주사파(酒邪派)도 생깁니다. 아무리 싼 희석주라지만 저, 그렇게 만만한 놈 아닙니다.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병나발'불고 그것도 모자라 멱살잡이 하는 것 보면 저의 기막힌 드난살이가 억울해집니다. 완투한답시고 10실점하는 괴물은 또 뭡니까. 3이닝 7실점하는 약골과 무슨 차이가 있나요. 방어율이 형편없을 때는 차라리 등판하지 마세요. 감독(술상사)과 선수(술상무)에게 '꼬장'부리지 말고 하루 쉬십시오. 감독이 마운드에서 내려오라고 하는데도 끝까지 던지겠다고 버티다가 결국 사고납디다. '술퍼맨'들이 아주 싫어하는 '선발'입니다.

강판을 당해도 도무지 라커룸(집)으로 향하지 않는 버릇은 또 뭡니까? 주정꾼은 귀소본능이 발달해 있는 법인데 희한한 일입니다. 이런 '투수'들은 꼭 이튿날 자신의 등판을 후회합니다. 헛방을 짚었다는 후회죠. 주인님의 혼 속에서 주소를 잃어버린 폭투(폭음)는 주변 사람들의 혼까지 앗아갑니다. 주인님의 파인더 속 풍경을 항상 시력 1.5로 맞추세요. 게슴츠레한 눈은 옆사람 삼진(골탕먹임)시킬 때 꼬나보는 것(포수와 사인 교환)같아 섬뜩합니다.

그리고 주인님. 제발 저 좀 섞지 마세요. 저 짬뽕 아주 싫어합니다. 그냥 있는 대로 드세요. 어떨 땐 콜라(소콜)에, 환타(소타-양키들이 즐겨 먹음)에, 흔한 경우지만 맥주통(소맥)에 수장시키기도 하죠. 제 동료, 양주야 맥주와 섞으면 '폼'이라도 나지 저는 그야말로 죽음이에요. '소맥'에 빠져 '자맥질'하는 내 모습이 불쌍하지도 않나요? 폭탄주 좋아하는 폭탄인간들, 전 아주 경멸합니다. 결국은 폭탄맞고 장의사차(택시)에 실려 가는 최후를 맞는 꼴이라니. 마치 뉴턴이 고등학생들의 머리를 쪼개고 '법칙의 사과'를 강제로 쑤셔넣는 것 같아요.

또 있습니다. 제발 히야시(冷やし:차게 함) 타령 좀 하지 마세요. 생긴 온도대로 두면 덧나나요? 냉동고에서 덜덜 떨다 보면 입이 쩍쩍 갈라진다고요. 자꾸 그러시면 저도 취하고 싶어집니다. 저를 마구 이용하지 마세요. 세속잡사 잊는 데 동원되고 싶지 않아요. 세상살이에서 구토하고 아파하고 질겁하여 도망치더라도 저를 붙들지 마세요.

봉두난발한 잡념의 오랑캐들이 쳐들어온다 해도 저를 들이붓지 마세요. 비가 오는 날이면 대폿집에서 돼지고기를 썰고 있는 여자를 훔쳐보면서 저를 까는 모습도 싫습니다. 빈 소주병의 외로움을 아시기나 하는건지. 술을 드셔야 술술 풀린다는 세상. 세상살이 박해가 녹아들고 꼬인 실타래가 술술 풀린다고요? 그러나 이닝수를 줄이세요. 경기가 안 좋아 38선이니 사오정이니, 오륙도니 말들 많은 세상 아닙니까? 그러니 건강하기라도 해야죠. 건강진단 때마다 꺼림칙한 기분으로 간장의 감마 GTP수치를 염려하는 일을 되풀이할 수는 없잖아요.

한평생을 70세로 잡는다면 인생의 4분의 1인 23년 정도는 잠을 잡니다. 일하는 시간은 11년이고 여가와 취미로 보내는 시간은 8년, 세탁하고 옷 입는 데 5년6개월, 밥 먹는 데 6년, 교육받고 독서하는 시간 6년, 대화하는 데 3년이 걸립니다. 그렇다면 술 마시는 데는 얼마나 걸릴까요. 1주일에 2번 4시간씩 마시면 1년이면 416시간, 40년을 그렇게 마시면 1만6,640시간, 693일을 마시는 셈입니다. 놀랍죠? 693일. 그것도 헐겁게 잡은 기준이니 몸이 배겨나겠습니까? 술판은 프로와 아마가 마구 뒤섞인 짬뽕그릇 같은 곳입니다. 고급과 저질, 좌익과 우익, 민주와 비민주 철저히 양분된 상술이죠. 그러니 저 같은 술에, 상술에, 조갈증을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연말에는 여행 좀 가야겠어요. 1년 동안 풀가동했더니 제 몸도 녹초가 됐답니다. 스스로를 '쌈마이' '아웃사이더'라고 자학하지 마세요. 술독에 빠져 또 한번 자신의 기억을 잃어버린다면 당신은 패잔병이 됩니다. 망(忘)은 '마음을 잃는다'는 글자이니 기억을 잊는다는 뜻이죠. 한해를 마감하는 뜻깊은 모꼬지. 술잔을 털지 말고 나쁜 기억을 털어내십시오. 이번에는 정말 '억지 없기'입니다.<굿데이신문 게재>

Posted by 나재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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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임주무퇴 혹은 삼자범퇴 2008.10.20 15: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발 히야시(冷やし:차게 함) 타령 좀 하지 마세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