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동사니'에 해당되는 글 63건

  1. 2008.11.24 백수일기1 (2)
  2. 2008.10.31 한국기자협회-촛불
  3. 2008.10.02 최진실을 추모하며

백수일기1

잡동사니 2008.11.24 09:48

 집에 있는 노트에서 우연찮게 '백수일기'를  발견했습니다.
요즘처럼 일자리 구하기 힘들 때 '백수'생활은 정말 힘들지요.
그 때 생각이 나서 그때의 글을 원문 그대로 옮겨봅니다.
일자리를 아직 구하지 못하신 여러분, 힘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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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차갑게 안녕을 고한 사람은 39억9999만9998년을 기다려 만난 사람인데 당신이 이별을 고한 것은 참을 수 없이 가벼운 판단을 한 것이라는 것을 왜 모르는가. 우리가 이 두 손으로 이루려는 모든 일은 그렇게 장구한 시간의 터널을 통과하여 예정된 일이다.․어른이 된다는 것은 이별을 제대로 받아들일수 있는가 없는가이다. 진정한 어른은 지금 자신에게 그것이 필요하더라도 버릴 줄 알고, 잃을 줄 알고 , 놓을 줄 아는 것이다.


 직장에 나갔다가도 항상 이별의 길냄새를 묻혀 돌아오곤 했다.
 세상은 흥겨운 엿불림(엿타령) 같다. 엿가위로 장단을 맞춰가며 덩실덩실 춤을 추듯 사는 것. "산홍아 너만 가고 나만 혼자 버리기냐. 너없는 이 세상은 눈오는 벌판이다. 달없는 사막이다. 불꺼진 항구란다." 
 구성진 쌍가위 장단처럼 조금은 어긋나도, 조금은 둔탁해도 박자에 맞춰 그냥 그렇게 사는 것. 쉬엄쉬엄 무리하지 않고 세월을 몸으로 받으며 사는 것.
 그런데 요즘따라 가난이 목구멍에서 일렁거린다. 가난한 자는 부자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가난한 자는 늘 '희망'이라는 달콤한 말을 입에 달고 산다. 희망은 자신을 용서하기 위한 편리한 도구다. 내일을 담보로 한 작위적인 화해법. 오늘은 빌어먹을지언정 내일이 오면 달라질 거라는 자기최면이다. 그러나 희망이란 외롭다. 잘못하다간 자기 가시에 찔리고 만다. 희망은 항상 내손 멀리에 있다. 아름다운 꿈일수록 흙탕물을 뒤집어쓰는 법이니.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된다. 희망이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라던 노신(魯迅)의 말, 나에겐 허망한 이명(耳鳴)같다.

오랫만에 용돈을 받았다.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한테서. 받지 않으려고 애면글면 하다가 호주머니에 받아넣었다. 학창시절 이후 처음인듯 싶었다. "왜그래? 나도 어른이야. 용돈받을 나이가 아니라고"

속으로만 힘껏 외쳤다. 그러나 이미 마음은 울고 있었다. 그것도 쓰리고 아픈 어른의 눈물이. 10여 년의 나인 투 파이브(오전 9시 출근, 오후 5시 퇴근) 봉급쟁이 생활이 선사한 처절한 눈물이었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는 꿈이 식어가고 있다. 일터가 식어가고 있다. 봉급쟁이의 희망은 '새경'이다. 월급을 받아야 한 달치의 희망을 다시 사고 그 희망으로 한 달을 다시 버티는 것이다. 그러나 희망의 보급로가 끊겼다. 봉급쟁이에게는 치명적인 악성바이러스다.
 골병든 현실 때문에 지병이 생겼다. 말 그대로 움직이는 종합병동이다. 일주일만 고생하면 낫던 감기가 두 달을 넘기고 있다. 감기가 아니라 지독한 열꽃이다. 마른 기침이 나오고 목구멍에선 알지 못할 어둠이 걸려 숨이 가쁘다. 그 어둠은 한움큼의 먹물을 쪽 뺀 무색무취다. 밤잠이 안 들도록 그 아픔은 폐부 깊은 곳까지 갉아먹는다. 환약으로도 낫지 않는 걸 보면 지병이 아니라 중병인 듯 싶다. 그러나 알고 보면 내 신병(身病)은 현실의 '지병'이다.

이제 사랑이 무섭고 사람이 무섭다. 아침부터 새벽까지 살을 부비며 살았던 동료들과의 사랑 때문에 가슴이 더 시리다. 그 사랑이, 그 사람이 떠나가고 있다. 죽는 것도 연습해야 한다. 이별하는 것도 연습해야 한다. 돈이란 사람이 있고 사랑이 있고 그 사람과 사랑을 위해 조금만 있으면 된다. 그러나 야속한 현실은 월급이 없으면 한 달이 없는 것이고 그 없어진 한 달 사이에 사람도 끼여있고 사랑도 끼여 있다는 것이다. 돈이 사람잡는다는 속설을 인정한다. 잔인한 하루가 무섭게 지나가고 있다. 2004년 11월10일. 10여년 만에 백수가 되었다. <2편에 계속>

Posted by 나재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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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까칠녀 2008.11.24 12: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소심쟁이.. 속으로만 외치고..ㅋㅋㅋㅋ
    백수라...
    대학졸업하고 한 2년 알바만 하면서..
    내가 배우고 싶은 의상 디자인 배우고.. 난 딱 백수가 내 체질이었는데..ㅋㅋ
    근데 그것도 나이가 먹으니 주위의 따가운 눈총..
    그래서 어쩔수없이 취직을 했따는..ㅋㅋㅋㅋ

  2. 감사 2008.11.24 13: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니, 그런 사연이......
    그래서 홍철이처럼 퍄숑감각이 있었구먼


한국기자협회보(2008년 7월 16일)에 실린 나재필의 글중 일부 발췌......
Posted by 나재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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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실을 추모하며

아, 이 시대의 별이여

만인의 연인으로 살다간 별이여

배우로 살고 드라마처럼 살다 영화처럼 떠난 여인이여

불혹의 세월이 그리도 서러웠더냐

배우의 세월이 그리도 서글펐더냐

타인의 삶은 그리도 잘 사셨소만

어찌 자신의 삶은 그리도 무심케 버리셨소

연기하는 것처럼 살면 될 것을…

연기하는 것처럼 웃으면 될 것을…

바람처럼 떠나버린 그대여

연기처럼 사라져간 그대여

울지 마오, 울지 마오

지상에서 다 못한 무대 있거든

천상의 무대서 그 영광 다시 한번 누리소서

가슴에 묻어두오

가슴을 비어두오

그 가슴 따뜻이 품어 안고 편안히 영면하소서

                                                 <2008년 10월 2일 나재필  拜上>


▶별이 떨어졌다. 그녀는 스타 중 빅스타였다. 88년 청춘스타로 떠 20년 연기생활 내내 최정상에 있었다. 그가 뜨면 드라마가 떴고 그가 나오면 대박이 났다. 그야말로 흥행의 여신이었다. 이영자, 정선희, 이소라, 홍진경, 엄정화와 ‘6총사’의 우정을 나눈 그녀는 두 아이의 엄마로, 전 국민의 배우로 장밋빛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연예계 데뷔전 극심한 가난 때문에 자살을 여러 번 시도했었고 매니저 배병수가 살해당하고 조성민과 파경을 겪으며 풍상고초(風霜苦楚)의 삶을 살았다. 불혹을 넘기면서는 '줌마렐라' 열풍의 중심에 서 있었고 만인의 연인으로 중년의 남자들을 여전히 설레게 했다.

▶그녀를 처음 만난 건 1993년 영화 ‘사랑하고 싶은 여자 & 결혼하고 싶은 여자’ 촬영장에서였다. 서울 충무로 시나리오작가 교육원에 다니던 시절이었는데 당대 최고의 청순배우를 직접 만났다는 사실 자체에 흥분했다. 흰 블라우스와 청바지 차림의 그녀에게서 후광(後光)이 났다. 그녀를 염탐하는 동안 내내 행복했던 기억이 난다. 작가가 꼭 되어 그녀를 내 시나리오의 여배우로 캐스팅하리라 목표를 세우기도 했다. 그것은 이 시대 최고의 여배우를 향한 꿈이자 짝사랑이었다.

▶그로부터 6년 후 여의도 국민일보 CCMM 빌딩내 스포츠투데이 신문사에서 그녀를 두 번째 만났다. 세월은 흘렀지만 그녀는 여전히 톱스타였다. 여인의 향기가 났다. 그녀의 흰 손과 악수하며 전율했다. 미소마저도 흰 빛깔로 빛났다. 그녀는 1968년 12월생으로 나보다 10개월 늦은 동갑내기다. 마흔 한 살. 
시나리오 나재필. 배우 최진실
나의 꿈은 하늘이 열리는 개천절 전날, 2008년 10월 2일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녀가 하늘로 떠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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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내용은 연합뉴스 기사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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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8년 MBC TV 드라마 '조선왕조 500년-한중록'으로 연기 생활을 시작한 탤런트 최진실(40)은 청춘 스타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후 변신을 거듭하며 줄곧 연예계 정상권을 지킨 톱스타다. 동명여중, 선일여고를 거쳐 갓 20세에 연예계에 데뷔한 최진실은 깜찍한 외모와 발랄한 이미지를 앞세워 데뷔 초부터 깜짝 스타로 주목받았다. 영화 '나의 사랑 나의 신부'(1990년), '미스터 맘마(1992년) 등과 드라마 '우리들의 천국'(1990년)에서 상큼한 연기를 펼쳤으며, 특히 최수종과 함께 출연한 인기 드라마 '질투'(1992년)를 통해 전 국민의 사랑을 받는 청춘스타로 발돋움했다. 그는 TV 광고에서도 매력적인 모습을 선보이며 'CF 요정'으로 대단한 사랑을 받았다. 모 가전제품 CF에서 싱그러운 표정으로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에요!"라고 말한 인상적인 코멘트로 대단한 화제를 일으켰다.

 출연작도 줄줄이 히트했다. 드라마 '별은 내 가슴에'(1996년), 영화 '마누라 죽이기'(1994년), '편지'(1997년) 등 그가 출연한 작품은 거의 예외 없이 흥행에 성공했다. 상복도 많았다. 1991년 대종상, 춘사영화제, 청룡영화제 신인상을 싹쓸이한 그는 대종상 여우주연상(1995년), 백상예술대상 인기상(1991년, 1995년, 1997년), MBC 연기대상 대상(1997년), 한국방송대상 여자탤런트상(1998년) 등 굵직한 상을 잇따라 거머쥐었다.

 하지만 최진실의 연예계 생활과 사생활은 오르막과 내리막을 거듭하는 등 순탄치만은 않았고 좋지않은 소식으로 자주 세간의 입방아에 올랐다.

 1994년 최진실의 전 매니저였던 배병수 씨가 살해되는 사건은 연예계 전체에도 큰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배 씨는 최진실의 운전사로 일했던 전용철 씨에게 살해됐고, 최진실은 공판에서 증인으로 출석하기도 했다.

 최진실은 2000년 프로야구계 톱스타인 조성민과의 결혼으로 다시 한 번 이목을 집중시켰다. 당대 최고의 여배우와 일본 명문 구단인 요미우리 자이언츠 투수의 결혼이라는 점에서 국내외적으로 화제가 됐다. 하지만 조성민과의 결혼 생활이 원만하게 계속되지 않으면서 승승장구하던 그의 인생에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조성민이 2002년 12월 결혼 생활이 파경을 맞았다는 기자회견을 한 후 부부는 별거생활을 해왔고, 2004년 8월 조성민이 최진실의 집에서 폭력을 휘둘러 긴급체포되는 사건까지 불거졌다.

 결국 최진실은 2004년 9월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고 조성민과의 결혼생활을 마무리했다. 조성민은 최진실과 그의 가족에게 진 빚을 전액 변제받는 대가로 아버지로서 친권을 포기했다. 이혼으로 인해 그는 모든 연예활동을 접는 등 연기 인생에 큰 타격을 받았다. 한 아파트 건설업체로부터 "분양광고 모델계약을 맺은 뒤 사생활 관리를 잘못해 기업이미지를 훼손시켰다"는 이유로 30억 원 규모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에 휘말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이혼의 아픔을 딛고 2005년 KBS 2TV 드라마 '장밋빛 인생'으로 재기에 성공한다. 이혼 후 암에 걸리면서도 악착같이 살아가는 '맹순이' 역에서 뛰어난 연기력을 선보여 KBS 연기대상 여자 최우수연기상과 백상예술대상 방송부문 최우수 여자연기상을 받았다. 2007년 MBC TV 드라마 '나쁜 여자 착한 여자'를 통해 데뷔 후 처음으로 일일극에 출연하며 꾸준한 연기 변신을 시도했다. 올 초에는 MBC TV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에서 아줌마의 판타지를 자극하며 '줌마렐라 신드롬'을 일으켰으며, 현재 OBS 경인TV의 '최진실의 진실과 구라'에 출연했다.

 최근에는 자녀의 성을 엄마의 성으로 바꿔 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지난 1월 법원에 성본변경허가 신청을 냈으며 5월 법원이 이 신청을 받아들임에 따라 7살 아들과 5살 딸의 성과 본을 자신의 것으로 고쳤다. <연합뉴스>

Posted by 나재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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