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忙中日記'에 해당되는 글 15건

  1. 2008.09.16 아버지2
  2. 2008.09.15 시나리오작가를 꿈꾸다
  3. 2008.09.11 어머니
  4. 2008.09.11 아버지
  5. 2008.09.11 망중일기를 시작하며 (1)

아버지2

忙中日記 2008. 9. 16. 18:03

지상에 만개했던 청춘의 꽃이여.

세월의 무게에 검은 꽃 되었네.

한파에도,

풍파에도 푸른 싹 틔워야 하는 맹화(猛火).

不眠의 시린 밤 보내고,

곡괭이, 삽 들고 노동요 부르며

푸른 핏줄마냥 시린 새벽으로 나가시던 아버지.

잠에 빠진 식솔의 아침보다

배꼽시계, 두 시간이나 빨랐던 아버지.

우리는 그 첫새벽의 노동을 알지 못했다.

아오지 탄광의 그 강제노동을 알지 못했다.

천금같은 내 새끼.

남들에 기죽을까, 남 눈에 밟힐까

윗마을 김씨에게 공납금 미리 꿔두고,

문방구 찰흙보다 더 찰진 산기슭 흙으로

준비물 챙겨주시던 궁벽의 촌부.

사과 한 짝 등짐매고

눈물 한 짐 목에 걸고

삼년 부은 곗돈 털어

지인 찾아 자식안위 읊조리고.

강한 척, 안 아픈 척

남몰래 뼈마디 주무르던,

남몰래 눈물줄기 으깨던 엄니 같던 아버지.

희망의 강은 함께

절망의 강은 혼자 건너시며

勇壯으로, 德長으로

노회한 황무지 개척하던 선구자 같던 아버지.

그 위대한 이름이여.

허리를 펴소서.


 70년대 후반 고향 수안보 온천엔 ‘가족탕'이라는 게 있었다. 가족 모두가 자그마한 탕을 통째로 빌렸다. 아버지, 어머니 등 가족 모두가 발가벗고 목욕했다. 그것은 가족이 행하는 경건한 의식 같은 거였다. 목욕을 같이 하면 친해진다. 아낌없이 보여주고 부끄럼없이 있다보면 친밀도가 쌓여간다.  요즘 들어 아버지는 알몸을 드러내지 않는다. 아버지가 부끄럼을 탄다. 그것은 늙어가는 시계추의 쓸쓸함이다. 무서웠던 아버지가 무섭지 않다. 차라리 무서웠으면 할 때가 있다. 아버지가 알몸을 보여주었으면 할 때가 있다. 아버지의 주름잡힌 세월을 보며 울고 있다. 아버지의 그늘을 보며 처절히 흐느끼고 있다. 자식의 그늘이 되어주었던 아버지가 어느새 그늘이 되다니.

Posted by 나재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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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신이기 싫었다. 절뚝이더라도 혼자이긴 싫었다.

 ‘결혼을 해서 행복할 수 있는 것은 철학자뿐이다'던 쇼펜하우어. 니체도 칸트도 독신이었지만 동행하고 싶지 않았다. 사랑은 불같은 것이다. 타오르다가 식고, 식다가 온기를 띠는 것이다. 그런 사랑은 끼니처럼 배고픈 것이다. 보고픔에 배고프고 만남에 배부른 것. 獨이 毒이 되면 아프다. 혼자 먹는 밥, 혼자 자는 방, 혼자 걷는 길, 혼자 마시는 술, 혼자 떠나는 여행, 혼자 앓는 신열, 혼자 보는 영화, 혼자 부르는 노래, 혼자 겪는 성애(性愛)는 슬프다. 때로는 너무 슬퍼 온 몸에 멍이 든다. 그래서 하나 더하기 하나, 둘을 생각한다. 둘이 먹는 밥, 둘이 자는 방, 둘이 걷는 길, 둘이 마시는 술, 둘이 떠나는 여행은 달콤하다. 나에게 결혼은 필요가 아니라 필수였다. 고독의 해방구, 척박한 삶의 비상구였다. 그러나 결혼을 위해선 '돈'이 필요했고 그 돈을 위해선 밥벌이가 필요했다. 달랑 수저 하나, 이불 한 채 더 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데이트 하던 시절 이른 그녀의 귀가가 싫어 선택한 것이 결혼이었다. 함께 밤을 새우고 함께 아침을 맞는 동질감을 원했다. 떼를 쓰고 잔머리를 굴려가며 그녀의 귀가를 늦추고 그녀의 외박을 부추기는 불한당 같은 욕심이 싫었다. 거리의 여관간판 불빛에 낯붉히고 추문(醜聞)이라도 날까봐 전전긍긍하는 비열함이 싫었다.

 당시 난 시나리오 공부를 하고 있는 백수였다. 서울 충무로 필동의 시나리오 작가 교육원에 다니며 영화판을 곁눈질하고 있었던 때였다. 시나리오만이 유일한 밥벌이처럼 느껴졌고 그런 나만의 '시나리오'는 적중하는 듯 했다. 그러나 영화동네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당장 ‘밥’이 되지 않았고 그들만의 ‘법’이 있었다. ‘은행나무 침대’와 비슷한 판타지물을 써 교수로부터 한때 칭찬도 들었지만 6개월 만에 그 일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돈' 때문이었다. 결혼 때문이었다. 그리고 '밥벌이'를 위해 직장을 찾아나섰다. 그 '밥'이 내가 원하는 밥은 아니었지만 결혼을 위해선 그 '밥'이 필요했다. 기자가 된 것은 순전히 밥벌이 때문이었다. 이제는 굶지 않을 만큼의 '밥'을 먹고 산다. 때문에 가끔은 그 옛날 영화판 열정이 소름처럼 돋곤 한다. 지금도 영화를 보면 온 몸이 쑤신다. 목구멍 공명통에서 메가폰 소리가 난다. 귓구멍 나팔관에서 배우의 구성진 대사가 떠오른다. 몸에 난 구멍마다 소리가 난다. 그 열병이, 나를 언젠가는 그토록 하고 싶었던 시나리오를 쓰게 할런지 모른다. 충무로 어느 뒷골목을 기웃거리며 한물 간 감독에게 한물 간 시나리오를 보여주며 소줏잔을 기울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교육원시절로부터 2년 뒤 내가 썼던 비슷한 소재의 '은행나무 침대'는 강제규 감독에 의해 영화화됐다. 독특한 시선으로 그만의 영화세계를 구축한 김기덕 감독은 같은 교육원 출신이다. 그는 ‘사마리아’와 ‘빈집’으로 베를린과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다. 돈을 갖고 튀어라, 깡패수업, 투캅스3, 행복한 장의사, 반칙왕, 조폭마누라,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수취인불명, 여고괴담, 파란대문, 섬, 단적비연수 등도 이 교육원에서 배출한 인재들의 작품이다. 부럽다.

1993년 4월

Posted by 나재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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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忙中日記 2008. 9. 11. 14:21
  어머니는 철녀였다. 그린의 소렌스탐 보다도, 트라이애슬론의 로라 리백 보다도, 코트의 나브라틸로바 보다도 강했다. 지치지 않았으며 쓰러지지 않았다. 촌살림이 그렇듯 아궁이에 군불을 지펴야 밥을 짓고, 우물을 길어야 부엌일이 되는 저급한 생활에서 한번도 힘든 내색을 안했다. 낮에는 농사를, 밤에는 허드렛일을 해야만 하는 ‘고된 2모작’을 쉼 없이 해냈다. 뻐걱거리는 퇴행성관절염을 앓게 만든, 돈은 안 되고 힘만 부치는 농사일, 고무줄 같은 취침시간에 새벽 5시 기상. (자식들 도시락을 싸기 위해, 밭으로의 출타를 맞추기 위해). 때로는 셈을 가르치는 선생님으로, 사계절 불침번을 서는 문지기로, 약손이 되어준 간호사로, 아버지의 완고함을 제어하는 컨트롤 아티스트로, 때로는 별 헤이는 밤 따뜻한 얘기로 자식의 흔들림을 막던 별밤지기로 1인 10역을 했다. 가정의 테두리 안에서 한번도 ‘탈영’하지 않은 위대한 모성애. 이 시대 모든 어머니가 그렇듯 내 안의 어머니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도 그렇게 모진 ‘아픔의 나이테'를 가졌다.


 어머니는 30여 년간 ‘배웅의 삶'을 살고 계시다. 배웅의 절차는 의외로 간단하다. 어머니는 내가 당신의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신다. 산모퉁이를 돌 때나 동네어귀를 돌 때나 내 모습이 안보일 때까지 손을 흔들며 동상처럼 서 계시는 것이다.
그 간단한 의식이 나에게는 항상 무언(無言)의 가르침이었다. 샛길이 보여도 홀가분하게 딴 길로 빠질 수가 없었다. 하루를 여는 배웅이요, 무사평안을 비는 치성 같은 것이었기에. 깡마른 얼굴, 앙상한 두 손, 點처럼 멀어져 가는 어머니의 ‘흰 모습'을 보며 내 존재에 대한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숙수지환(菽水之歡:콩죽과 물로 생활을 영위하지만 부모에게 효도함)을 하지 못하는 ‘절름발이 자식'에게 변함없는 나무로 서 계시는 어머니, 고맙습니다.


 아래 글은 68세의 어머니가 쓴 일기중의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

 세월의 징검다리를 건너가는 시간의 발자국 소리. 성큼성큼 딛고 가는 이 한줄기 길 위에서 우리네 삶은 가련하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다 가기 전에 알찬 일들을 해야 할 텐데. 한없이 푸른 잎새 처럼 너울거리고 싶다. 싱싱한 생명력을 지니고 싶다. 아지랑이 숨결 속에 새움이 돋아나듯 나의 생명력도 그러할 수만 있다면, 때로는 바람맞고 눈비에 지친 날에도 최선을 다할 수 있을 텐데….

 ………

 자식들의 등불이 되고프다. 단단하고 강인한 땅을 뚫고 뾰족이 솟아나고 있는 새싹들이여 푸름을 뽐내지 말게나. 나에게도 내 무거운 짐을 덜어주는 새싹 같은 자식이 있단다.

 ………

 주목받고 싶다. 恨많고 설움 많은 세월을 흘러가는 강물에, 돛단배 실어 이 하늘 끝까지 한들한들 띄어 보내고 싶다. 나는 스스로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강한 사람이다. 세월은 흘러 어느덧 백발이 되어 몸은 비록 노쇠해졌지만 마음은 청춘이다. 봄이 오면 강인한 풀잎들이 땅을 뚫고 나와 작고 푸른 꽃들을 피우듯이 나 또한 끈질기게 살고 싶다.

 ………


 어머니 때문에 운다. 어머니라는 단어만 나와도 온 몸이 운다. 세포 하나하나가 따로 운다. 자식 때문에 수없이 울었을 어머니 때문에 운다. 그동안 그런 마음을 내색하지 못하고 살아 온 어리석음 때문에 운다. 소리 내어 운다. 남몰래 울기에는 어머니의 아득한 깊이를 헤아리지 못하기에 소리 내어 운다. ‘천금같은 내 새끼’로 살아 온 나의 뻔뻔함 때문에 운다. 자식이 무언데 그리도 주름 많게 살아온 걸까. 이제야 안다. 프랑스 사람들이 바다(la mer)를 어머니(la mere)로 부르는 이유를. 어머니는 바다다. 아, 나의 사랑스러운 바다여 영원히 그 흐름 멈추지 마소서.

Posted by 나재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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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忙中日記 2008. 9. 11. 14:17
 아버지, 지팡이가 되셨다. 꼬부랑이 되셨다. 얼굴엔 세월의 깊디깊은 밭고랑이 생겼고, 앙상한 뼈마디엔 찬바람이 몰아친다. 창백한 햇살이다. 얼마 전에는 당뇨까지 생겨 잔혹한 하루하루와 싸우고 있다. 화가 나시면 두 눈에 불꽃이 튀시던, 그 강골의 아버지가 약골이 됐다. 너무나 무서워 반항할 수도 없었던 학창시절. 밭고랑으로, 야산으로 줄행랑치던 아들이었기에 그 속절없는 꺾임에 더 눈물이 난다. 십 오리 길을 자전거를 타고 다녀야 했기에 우리 집엔 자전거가 세대였다. 나와 형, 아버지는 시쳇말로 ‘잔차맨(자전차맨)’이었다. 아버지는 자전거 체인이 엉키거나, 펑크가 나거나, 고장이 났을 때 기술자처럼, 아니 귀신처럼 고쳤다. 10여 년을 통학하면서 자전거포에 간 기억이 없다.

 
지금 내게도 자전거 두 대가 있다. 그 자전거를 이제 내가 고치고 있다. 그 독한 아버지 대신 내가 두 아들의 체인을 고치고 있다. 말수가 적었던 나에게 입에 곰팡이 나겠다고 다그치시던 아버지처럼 내가 아이들에게 대화를 독촉하고 있다. 편식을 탓하던 아버지처럼 나도 아들의 편식을 나무라고 있다. 커서는 아버지처럼 잔소리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나도 아버지를 닮아가고 있다. 무서운 피다.


 지금 창밖엔 적갈색의 단풍이 겨울 길목서 가볍게 몸서리치고 있다. 저 단풍을 보며 아버지를 떠올린다. 저 낙엽을 보며 인생을 생각한다.
단풍은 나무와 잎이 이별하는 것이다. 곧 사라질 것들이 남기고 가는 마지막 선물이다. 모든 걸 떠나보내고 쓸쓸해진다. 하루 25km 남하하는 단풍. 그 단풍처럼 색 바랜 아버지, 낙엽처럼 쓸쓸한 노년의 아버지, 저 빛바랜 낙엽처럼 노쇠한 아버지를 보며 난 뒤돌아 운다. 어쩌면 그렇게도 마른 낙엽을 닮았는지. 너무나 강해 쓰러지지 않을 것 같은 아버지의 쓰러짐을 보며 아무도 모르게, 들키지 않도록 속절없이 운다. 내 눈물을 아들은 모를 것이다. 그러나 내 나이가 되면 아들도 나의 눈물을 이해하게 될 것이고 그도 울 것이다.


 고등학교 때 젊은 객기로 돈도 없이 술을 진탕 먹고 아버지께 술값을 받으러 간 적이 있었다. 그때 아버지는 아무 말도, 아무 제재도 없이 선뜻 술값을 내 주셨다. 학생이 무슨 술이냐고, 그것도 공술을 먹고 다니느냐고 몽둥이 찜질을 해도 시원찮을 판에 아버지는 장롱서 꼬깃꼬깃한 돈을 내주셨다. 오히려 그 묵언이, 무폭력이 질풍노도의 소년에게는 더 무서운 가르침이었다.


어느새 나도 아버지의 불혹을 맞았다. 또래의 어린 손자를 잃어버린 할아버지가 부모들도 포기한 어린 핏줄을 찾기 위해 엿장수가 되었다는 얘기가 이제는 아프게 박힌다. 그 엿가락 소리는 할아버지의 절규다. 나보다 29번의 겨울과 29번의 봄을 더 보낸 아버지. 시지푸스의 노동처럼 그 끝없는 세월을 노동으로 산 아버지. 남들 아버지처럼 달마다
누런 월급봉투를 가지고 나타난 적이 없는 블루칼라였지만 자식을 화이트칼라로 만들기 위해 헌신한 아버지, 고맙습니다. 오래오래 사소서.

Posted by 나재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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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거래사입니다.
 낮달처럼 쓸쓸히 고향 떠나온 자의 귀향입니다. 제게 글은 잊었던 유년으로 돌아가는 스텝이고 고향을 다시 찾게 하는 기억의 첫걸음입니다. 홀로 남겨진 촌로에 대한 그리움이요, 핍진한 삶에 대한 탈출이자 잠자는 의식을 깨우는 죽비소리 입니다. 항상 삶을 염탐하고 으깨던 반동(反動)의 망향가이기도 합니다.

 글은 화장(化粧)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웠다가 다시 단장하고, 지웠다가 다시 생각하는 퇴고의 과정 말입니다. 때문에 묵혀두었던 글들이 화석(化石)이 되기 전에 죽비로 깨워 화장하려 합니다. 뒤란에 처박아 놓았던 두억시니 같은 글들을 모으고, 세상 살면서 아무렇게나 버리고 온 번민과 상처의 흔적들을 주워 담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하지 않으면 영원히 할 수 없다는 조급함도 망중일기(忙中日記)를 탄생시킨 배경입니다. 그러나 부끄러움은 감출 수 없습니다. 며칠 밤 이앓이를 하면서도 막상 이 빼기는 망설여지는, 뭐 그런 느낌. 세상 끝으로 가는 고단한 여정 속의 아름다운 동행이라고 미쁘게 봐주십시오.

  망중한에 쓴다는 의미로 이름지어진 忙中日記는 시와 에세이의 접목입니다. 시집을 내기엔 역량이 모자라고 에세이로 묶기엔 지난 날 긁적거렸던 시들이 불쌍해 합친 것입니다. 시로 읽는 에세이, 에세이로 읽는 詩 정도로 봐주십시오. 

                                        2008년 9월 한가위를 앞둔 날

Posted by 나재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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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가을에 2008.09.11 23: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또한 忙中閑 귀히 읽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