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忙中日記'에 해당되는 글 15건

  1. 2009.10.06 사노라면...낙향을 꿈꾸며 (4)
  2. 2009.06.20 비를 너무 사랑한 술 (5)
  3. 2008.10.30 노래하는 얄개들 (4)
  4. 2008.10.30 사춘기 사추기
  5. 2008.10.30 에로세상에 사는 애로
  6. 2008.10.30 가을날의 몽정(夢精)
  7. 2008.10.18 술 이야기 (1)
  8. 2008.10.01 연리지, 그리고 고독
  9. 2008.10.01 청어의 꿈
  10. 2008.09.22 외딴 집


아래 글은 한국언론재단 '신문과 방송' 책자 10월호에 실린 저의 기고입니다. 언제나 낙향다운 낙향을 그리는 한 인간의 씁쓸한  여정의 기록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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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나리봇짐을 꾸렸다. 8년간의 서울생활, 13년간의 편집기자 생활을 정리하는 의미였다. 김삿갓은 하나의 로망이었고 그 방랑벽을 고스란히 떠안고 낙향을 결심한 것이다.
수 백 만장의 텍스트를 읽고 또 읽었던 직업이었는데 달랑 A4용지 한 장으로 수속을 마쳤다.

신문기자로 산다는 것은 고행이었다. 샛길로 빠질 여유조차 없이 앞만 보고 달리다보니 이직의 꿈이 항상 보푸라기처럼 일었다. 술과 일과 피로 속에서 하루하루 근심의 나이테만 켜켜이 쌓여갔다. 매년 쭉쭉 오르는 연봉에 신바람이 났지만 시시때때로 배반의 장미에 찔려 눈물 흘리는 나약한 인간 군상을 느끼며 몸 안에 찬바람이 불었다.

그러다보니 직장을 7번이나 옮기는 콤플렉스가 생겼다. 성실성이 부족하다거나, 충성도가 떨어져 이직을 반복한 것은 아니다. 직장의 제1조건이 ‘돈’이 아님을 알았을 때, 능력을 인정해주지 않고 ‘정(情)’을 방관할 때 직장은 ‘머슴’에 준하는 인력시장일 뿐이었다.

연간 휴일 140일, 하루 8시간 근무, 전 직원 해외여행, 전 직원 정규직, 육아휴직 최대 9년, 60세 정년보장은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신의와 비전을 바랬다. 신(神)의 직장을 원한 것이 아닌데 회사는 ‘신(辛)의 직장’으로 칼날을 곧추세웠다. 가로 39.4㎝ 세로 54.5㎝의 지면에 바친 청춘은 중년의 비포장도로로 접어들면서 스러져갔다. 가끔은 빗물에 눈물을 감추며 달렸다. 낙향은 그래서 탈출구이자 비상구였다.

세상살이에 구토하고 비토하고, 아파한 기억들이 고향 땅에 내려앉았다. 봄이면 매화꽃과 살구꽃이 흐북하게 피어나던 고향. 적당한 욕망이 있고, 청승맞은 밤에게 술잔을 건넬 수 있는 고향. 고향에선 토악질도 편하고 배설도 편했다. 내가 아프고 힘들고 ‘술이 필요할 만큼’ 외로울 때 달려와 술이 되고 말이 되고 어깨동무가 되어주는 고향.

그러나 낙향한지 얼마 후 난 다시 고향의 신문사를 기웃거리게 됐다. 활어시장 같은 편집국이 생각났던 것이다. 펄떡펄떡 뛰는 생선의 오르가슴을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잉크냄새 폴폴 풍기며 윤전기가 돌아가는 그 전쟁터를 떠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싱싱함을 잊을 수 없어서 수 일 동안 술독에 빠져 살다가 지방 신문사에 다시 들어갔다.

신문사는 여전히 정글의 전사를 키우고 있었다. 특별하다는 오만 속에 맨주먹 정신을 가르치고, 술 냄새와 인간의 냄새가 오묘하게 합쳐진 그로테스크한 곳. 콘크리트 세상을 벗어나 맨발로 뛰고 싶었지만 다시 콘크리트였다. 늘 마음이 뻥 뚫려 있었는데 고향에서도 천공(穿孔)이 났다. 본래 있었어야 할 작은 파편이 제대로 와 박힌 듯이. 그러나 편해졌다. 분노와 미움으로 점철된 치열한 ‘삶의 체험현장’이 끝나서인지 편해졌다. 맹수의 살기가 사라져 편해졌다. 샹그릴라(shangri-la)는 아니지만 여전히 ‘잃어버린 지평선’을 찾아 헤매는 꿈이 있었다. 그리고 내가 열애한 신문편집을 다시 하게 돼 행복했다.

고액연봉자로 꽤 산듯한데 지금도 빚 빼면 서까래 하나 남는다. 여전히 가난하다. 그러나 척박한 환경이더라도 마음속에 나무 몇 그루 심어놓고 산다. 달콤한 수액을 주는 대신 다른 벌레들이 꼬이는 것을 막는 벚나무, 모기가 들끓지 않도록 해주는 산초나무, 우물가에 심었다가 그 잎을 물위에 띄워 나그네의 물갈이를 막아준 버드나무, 먼 길을 떠나는 나그네를 위해 오리(2㎞)마다 심은 오리나무, 옛 시골집 길손에게 뒷간 가는 길을 알려주었다는 감나무, 일을 돕기 위해 처가에 온 사위의 지게를 가볍게 하기 위해 약한 덩굴로 질빵을 매줬다는데서 이름 붙은 사위질빵나무 등을 키우면서 말이다.

그리고 염원한다. 16년차를 향해 내달리고 있는 ‘지금’을 떠나 낙향다운 낙향을 언젠가는 하리라고. 텃밭에 고추며 오이며 토마토 등 채소들을 기르고, 사계절동안 여러가지 입성을 갈아입는 초록을 즐기며, 도시서 놀러온 지우(知友)들에게 햇살 같은 자연을 선물할 수 있는 그곳으로 가리라고. 비루먹을 상념이 폐선의 갑판처럼 삐걱대더라도 ‘나’를 내려놓을 수 있는 진정한 고향으로 가겠노라고.

해바라기는 태양의 궤적을 따라 동에서 서로 꽃을 움직인다. 더 놀라운 것은 암실에서도 해바라기는 빛이 있는 곳에서 그랬던 것처럼 동에서 서로 꽃을 움직인다. 빛을 쫓는 습성이 몸에 배어 있기 때문이다. 나 또한 ‘습성’대로 살았다. 세상이 다 그런 줄 알고 ‘버릇’처럼 살았다. 그러나 이제 나를 감싸고 있었던 ‘무거운 갑옷’을 벗어놓는다. 세상이 아무리 날 흔들어대도 무소의 뿔처럼 내 길을 가기 위해서.

Posted by 나재필


그림 속 멀리 보이는 모퉁이 쪽에서 사랑하는 님이 걸어올 것 같지 않나요? 그럼, 우산을 집어 던지고 달려가세요. 빗물에 세상살이 고달픈 눈물이 가려지도록….

눈물 나게 그리운 날
나는 비가 된다.
우산이 된다.
혼자 걷다 눈물 나면 우산 접고 비를 맞고
비를 맞다 눈물 나면 마음 접고 비를 맞고

눈물 나게 보고픈 날
나는 새가 된다.
창가로 간다.
노래보다 살가우면 날개 접고 노래하고
노래하다 보고프면 창문 열고 살 부비고

눈물 나게 서글픈 날
나는 술이 된다.
망각이 된다.
거나하게 술 취하면 마음으로 다스리고
다스리다 못 견디면 망각으로 앓아야지

아, 눈물 나는 날
난 비가 되고 술이 되고 우산이 된다.



 雨~~悲(비)...............

 비가 오는 날엔 술 생각이 난다. 가끔 그런 것이 아니라 무시로 그렇다. 때문에 우기(雨期) 때면 술 먹는 날이 잦아진다. 비가 술이고 술이 비다. 비가 안주고, 빗물이 술잔이다. 왜 비 오는 날 술이 당기는 걸까. 촉촉이 젖은 비가 축축하게 마음을 적시기 때문일 것이다. 술집 중에서도 멋들어진 레스토랑이나 호프집보다는 비가 보이는, 빗소리가 들리는 선술집이 좋다. 바깥 풍경을 보며 비에 젖는 상념들을 볼 수 있어 좋다. 우산을 쓴 나무들과 우비를 입은 처마를 볼 수 있어 행복하다. 고즈넉한 세상 밖의 풍경과 넉넉한 세상 속의 풍경들이 오버랩 되면서 술잔은 달디 단 풍류가 된다. 실연당한 청춘과 시련의 중년들이 모여 한 순배 두 순배 인생의 고단함을 마신다. 술엔 지짐이가 제격인데 그 중에서도 파전이 으뜸이다. 지글지글 볶아대고 삶아대는 세상처럼, 지짐이는 모든 아픔들을 지지고 볶아 ‘아름다운 보름달’이 된다. 요즘 들어선 두부에 김치를 말아먹는 것도 제법 웰빙스럽게 느껴진다.

 요즘엔 비가 오면 무조건 우산을 뒤집어쓰지만 옛날엔 그냥 비를 맞았다. 비를 맞으면 처음과 끝이 달랐다. 처음엔 추비할 정도로 폼도 안나지만 조금 맞다보면 체온과 섞여 안온했다. 사람들은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을 터벅터벅 걸으며 우울한 심사를 털었다. 머리에 오염물질을 뒤집어써야 하는 요즘의 비와는 색깔이 달랐다. 맞고 싶고, 젖고 싶은데 그런 비가 사라진 것이다. 이류 대폿집에서 일류 시인의 시집을 한쪽에 놓고 삼류사회의 기득권을 안주삼아 독주를 들이켜던 낭만은 이제 사라졌다. 비주류(非主流)속 주류인(酒流人)의 애환일 뿐이다. 아직도 비가 오는 날이면 대폿집에서 돼지고기를 썰고 있는 여자를 훔쳐보면서 빈속에 소주를 들이켜는 나를 만난다. 주독(酒毒)이 올라 음주 횟수는 많이 줄었지만 그래도 좋은 사람과 만나면 쓴 소주라도 한잔 하고 싶다. 물론 예전만큼 비가 올 때마다 날궂이를 하지는 않는다. 세상에, 좋은 사람이 많이 없으니 사람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비스듬한 우산이 아름답다고 하지 않던가. 둘이 쓰는 우산이 비좁아도 상대방이 젖을까봐 우산을 기울여주는 아름다운 배려, 넉넉한 희생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의 어깨는 젖어도, 당신은 어깨는 봄볕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오늘도 비가 내린다. 막걸리에 파전 하나 먹으며 로또 얘기를 하면 금상첨화일 듯한데 몸 컨디션이 좋지 않다. 그래서 빗소리를 들으며 비를 구경한다. 그런데 술이 빠지니 영 기분이 안난다. 역시 비엔 술, 술엔 비다.

Posted by 나재필


 빨리 크기를 소망했다. 어른이 되고 싶었다. 소년이 싫었다. 하루에도 여러 번 처마 밑 대들보에 금까지 그어가며 키를 쟀다. 콩나물시루처럼 아침이면 부쩍 커있는 나를 보고 싶었다. 그러나 자라지 않았다. 사춘기는 아프기만 할뿐이었다. 목소리는 변성기를 앓고 가슴은 부질없는 속앓이를 했다. 무서웠다. 꿈조차도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공부를 멀리 하고 친구들과 몰려다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눈을 팔게 되었다. 다름 아닌 딴따라. 친구들과 <좋은 친구들>이라는 밴드를 결성했다. 나는 기타 치는 재주가 없어 부득불 드럼을 맡았다. rock~&~roll.

여름방학이 시작되자 우린 벽촌으로 숨어들어 연습을 시작했다. 제천 두학면 자작리라는 곳인데 퍼스트 기타 겸 보컬을 맡은 친구가 그곳에 살았다. 비포장도로를 한없이 달려 종점에 다다르면 버스 돌릴 공터도 없는 깡촌(강촌)이었다. 그곳에 모인 네 명의 친구는 기타 두 명, 베이시스트, 드럼으로 나뉘어 밤낮으로 연습했다. 버스 종점은 사람을 그리움에 사무치게 하는 습성이 있다. 출발점을 종점으로 하고 종점을 출발점 삼는 버스를 보며 인생이 뭔가하는 감상에 젖는다.

드럼은 용돈을 모아 중고로 구입했다. 주로 연습한 곡은 ‘건아들'의 ’젊은 미소‘였다. 당시 젊은 미소를 완주(完奏)하면 다른 곡들도 쉽게 연주할 수 있다는 소리를 들었었다. 샌드페블즈의 ‘나 어떡해’, 들국화(전인권), 부활(이승철) 등의 곡도 주된 연습곡이었다. 우린 네오나치 패거리들이 선호하는 스킨헤드를 하고는 날마다 쿵쿵따다~쿵쿵따다 했다. 물론 악보 보는 법을 잘 몰라 드럼의 경우 카세트 음악을 들으면서 음계를 카피했다. 들으면서 카피하면 청음능력도 좋아지고 각 파트의 소리의 차이를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나는 악보를 볼 줄도 쓸 줄도 모른다"고 말한 mr.Big의 빌리시안의 말처럼).

림숏, 하이햇 오픈-클로스 같은 기본적인 주법은 대강 교본을 보고 기본적인 레퍼토리를 구성하고 나머지는 대강대강 때렸다. 스네어 드럼(snare Drum)과 하이-헷 심벌(Hi-Hat-cymbal)을 기본으로 치고 크래쉬 심벌(Crash Cymbal), 스몰 탐탐(Small Tom Tom), 라지탐탐(Large Tom Tom), 라이드 심벌(Ride cymbal)등을 기각기 한다. 기각기는 스네어-스몰탐탐-라지 탐탐을 2연음이든지 3연음, 혹은 4연음 등을 리듬, 박자에 맞추어 차례로 돌려치는 것을 말한다. 하이햇이 8비트라면 각기는 16비트로 돌리면 된다. 쿵 딱 쿵 딱 두구두구 두구두구 두구두구 두구두구 챙~, 쿵딱은 킥과 스네어이고 두구두구는 스네어-스몰탐-라지탐-플로어탐을 말한다. 각기를 부드럽게 돌리려면 드럼의 고무판을 제대로 맞춰야 한다. 베이스 드럼(Base Drum)은 큰 북처럼 생긴 것으로 발로 꾹꾹 밟는다. 그런데 손과 발이 따로 놀아야 한다는 게 제일 고역이었다. 스네어드럼은 왼손, 하이-헷 심벌은 오른손, 오른 발로는 베이스드럼을 밟는데 박자에 따라 손발이 낑낑댔다. 엇박자였다.

친구의 집은 가난했다. 때문에 삼시(三時) 세끼가 문제였다. 밥은 있는데 반찬이 없었다. 그렇다고 젊은것들이 모여 공부는 안하고 미친 년 꽹과리 치듯이 놀고 있으니 반찬이 좋을 리 없었다. 1식1찬, 밥과 고추가 전부였다. 청양고추를 된장에 찍어 먹는 게 유일했다. 청춘의 매콤한 반찬, 그래도 젊어서인지 눈물 콧물 다 빼며 맛나게 먹었다.

연습한지 두 달이 넘었을 즈음 초등학교 분교 운동장에서 첫 공연을 했다. 교단에 악기를 설치하고 동네방네 돌아다니면서 홍보를 했다. 심지어는 이장께서 마이크 방송까지 해주었다. 오후6시에 시작한 공연은 단 40분 만에 막을 내렸다. 관객이 30여명에 불과한 것도 맥 빠지는 일이었지만 문제는 공연 자체가 엉망진창이었다. 화음은 둘째 치고 저마다 잘났다고 따로 놀았다. 곡이 맞을 리 없었다. ‘젊은 미소’ 한 곡이 끝나자 관객이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드럼을 치다가 스틱이 날라 가는 사고도 있었다. 악사가 연장을 놓치다니. 완전한 실패였다. 연습이 짧았다는 자위(自慰)는 하나마나였다.

40분 만에 막을 내린 얄개들의 첫 공연은 결국 마지막 공연이 되었다.(그후 드럼을 택시에 싣고 운반하는 도중 사람만 내리고 드럼은 놔두고 내렸다. 멍청한 드럼주인)

Posted by 나재필

1. 思春期

너무 아팠다. 너무 아파서 소리도 못 냈다. 소리를 내고 싶어도 입천장이 파닥거리지 않았다. 열다섯에 찾아온 사춘기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비죽비죽 손댈 틈이 없었다. 스크린, 섹스, 스포츠에 열광했다. 내 몸의 점령군도 성징을 두드리며 몰려왔다. 달포가 못 지나서 이미 쿠데타는 끝났다. 그 불온한 전쟁에 여자가 있었다. 중심에 서서 춘정을 흔들었다. 가끔은 벼랑 위를, 가끔은 격랑 속을 비집으며 아프게 흔들었다. 빛바랜 도색사진을 보고 밤마다 웃었다. 밤마다 두려웠다.

2. 思秋期

너무 매웠다. 너무 매워서 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스무 살에 찾아온 사추기는 딴 세상이었다. 이 땅의 점령군이 민주를 깡그리 부시며 쳐들어왔다. 2년 넘게 전쟁은 계속됐다. 그 불한당 같은 전쟁 속에 여자가 있었다. 중심에 서서 춘심을 깨웠다. 가끔은 미친 새처럼, 가끔은 병든 새처럼 속살을 헤집으며 슬프게 왔다. 연애편지를 쓰며 밤마다 울었다. 밤마다 배회했다. 그녀가 시작이고 끝이었다. 초침은 정지됐고 시간은 고장 나 있었다. 울었다. 한 끼 밥과도 허무한 사랑이 시작됐다.


家出記

지금 몇 시입니까?
고독日, 슬픔時, 아픔分, 절망秒입니다.
고독의 시간으로 모정의 강을 건너
외롭게 살아온 괴로운 시간이었죠.
삶을 한두 번 탈출했었고
가족 울타리서 두세 번 탈옥했으며
인연의 끈에 잡혀 돌아오곤 했지요.
처음엔 그저 호기심에 시작한
탈주가 버릇이 됐습니다.
이제 떠날 수 없는 나이.
떠나서는 안 될 나이.
커버린 몸과 퇴화된 시간.
이제 떠나지 않을 테요.
탈출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걸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만한 세월의 江.
봄기운 못 견뎌 뛰쳐나온 思春期.
용서하세요.
이제 제 몸에서 방황은 안녕입니다.

Posted by 나재필


 예전에 재미를 본 영화는 80년대 추억을 재생한 것들이다. 하드코어(Hardcore) 섹스코미디. 그 중에서도 섹스코드가 떴다. 장롱 속에 보관해 놓고 몰래 꺼내보던 도색잡지, 여관에서 구멍으로 훔쳐보던 섹스, 친구집에 숨겨둔 포르노 몰래 보기, 예쁜 여선생님 치맛속 보기 같은 야릇한 되새김질이 유쾌하다. 십수년 전에도 에로영화가 많았다. 70년대 트로이카인 유지인 정윤희, 장미희. <광화사>로 데뷔한 유지인은 정형미인이다. 그녀는 <너는 달 나는 해> <마지막 겨울>에서 지적인 관능을 보여줬다. 정윤희는 <꽃순이를 아시나요>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에서 정말 몸으로 울었다. 그녀를 보면 가볍게 들까부는 배의 요동처럼 멀미가 났다. 장미희는 <겨울여자> <욕망의 늪> <적도의 꽃> <깊고 푸른 밤> 등에서 미희(美姬)처럼 나왔다. 그녀는 마치 기초화장을 막 끝낸 여인의 모습처럼 청수했다.

이들의 바통을 이어받은 배우는 원미경. <밤의 찬가>는 그렇다 치고 <물레야 물레야> <사노> <변강쇠> 등에서 선보인 농염한 연기는 골방에 붙은 도색달력처럼 뭇 남성의 마음을 달뜨게 했다. 달뜬 공상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여배우〓배설도 안함'이라는 순진한 등식까지 만들어냈다. 여선생님에게서 느꼈던 풋풋하면서도 비밀스러운 짝사랑 같은 것이었다.

"술은 입으로 오고 사랑은 눈으로 오니, 나는 술잔을 입술에 대고 그대를 바라보노라"며 예이츠의 시를 연방 되뇌었다. 모두가 삿된 생각이었지만 생살을 부대끼며 고뇌한 시간들이기도 했다. 음흉한 상상은 무시로 떠올랐고, 그때쯤 친구의 누나를 흠모했던 것 같다.

“좁은 단칸방 한 이불 속에서 아버지와 함께 자면서 용두질을 해도 아버지는 모르는 척해주었다"(윤구병의 '가출' 중에서)처럼 모든 것이 아프게 저며왔다. 섹스신 촬영 중 진짜 일을 저지르는 게 아닌가 하고 친구와 격론을 벌이기도 했다. "진짜로 하는 걸 거야." "저질 같은 놈."

가슴 노출은 흔했고, 공사 안한 헤어누드도 왈패 눈에 가끔 목격됐다. 80년대 헤로인 이미숙은 <뽕>에서 관음증을 증폭시켰다. 열여섯살 무렵 참외 한개에 총각 녀석들에게 정조를 내준 것이나 벼 몇섬, 돈 몇원, 저고릿감 한벌에 그 짓을 하고 나중엔 업이 돼 실없는 짓을 하는 장면은 마치 내가 뽕서리를 하다가 뽕밭에 누워버린 듯한 질펀함을 가져다 주었다. 이후에 본 나영희의 <매춘>, 가슴 큰 여자 안소영의 <애마부인>은 몽정기의 황량한 벌판에 불바람을 일으켰다. 그녀는 '벌떡녀'였고 요부처럼 굴었다. 박원숙의 <어우동>, 이보희의 <무릎과 무릎 사이>, 선우일란의 <산딸기>는 말 그대로 육탄공세였다. 강리나는 <대물> <뽕밭 나그네> <변금련>에서 홑껍질을 벗었다. <물의 나라> <마리아와 여인숙> 등을 찍은 심혜진은 대밭 속의 오수나 보리밭의 음산한 '아나키스트'를 떠올리게 했다. 강수연의 <씨받이>는 도발적이었고, '엉덩이가 예쁜 여자' 정선경은 <너에게 나를 보낸다>에서 후배위도 했다. 마치 마음속에 영문 'WXY'를 낙서하는 기분이었다. 4대 뽕녀 예지원의 <뽕>, 2대 옹녀 하유미의 <변강쇠3>나 김태연의 데뷔작 <거짓말>은 '실제 정사'라고 믿었다.

영화들 대부분은 원시적이고 적나라하고 외설적이고 선정적이었다. 마님과 머슴, 대감과 몸종, 사장과 식모(가정부), 사장부인과 운전사, 사장과 여직원, 고학생과 여사장, 가정교사와 학생아버지, 과부와 홀아비, 과부와 머슴, 남편의 부재와 부정한 아내, 아내와 수리공…. 단순한 관계설정이었으나 야했다. 지나친 교성에 덧칠한 오버액션이 문제였지만…. 몽정기 주인공들처럼 '걸쭉한' 성담, 혈기왕성한 청춘들의 성적 욕망과 섭취는 너무 배부른 것이었다. 이때쯤 내 의식에도 에로와 애로를 가늠할 수 있는 지적 성숙이 찾아왔다.

섹스심벌로서의 우상은 사라지고 비밀스러운 성장통도 멎었다. 잡지의 속옷선전, 생리대 선전, 여자화장실 표지판, 여자 종아리만 봐도 가슴이 뛰던, 그런 날 밤이면 몽정을 심하게 앓던 사춘기의 소년은 어느새 부쩍 커 있었다. 악마적 에로티시즘의 탈출이었다. 이후 진희경의 <모텔선인장>, 이재은의 <노랑머리>와 <세기말>, 서정의 <섬>을 만났고 37인치 가슴 하나로 에로계를 평정했던 '젖소 부인' 진도희를 만났다. 그녀들은 식욕과 성욕은 인간의 본성이라는 식색성야(食色性也)의 혼란에 빠지게 했다. 그러나 몽정기 속 여우들은 아름다웠다. 그때 그 시절의 에로가 애로가 돼 묻어버리고 싶을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에로도 눈물겨운 예혼(藝魂)임을 인정한다. 그 애증이 지나간 흑백 네거티브처럼 먼지 쌓인 의식창고에서 사라졌지만 소중한 '성장 나이테'로 소중하게 남아 있는 것을 보면….

Posted by 나재필

 어느 소설, 어느 구절엔가 이런 대목이 있다.
#1. 전장으로 떠나는 남자와 이별하는 여자의 마지막 밤.
#2. 안타깝게 찾아든 낡고 혼잡한 여관.
#3. 침대맡에 앉은 여자(침통하게)가 말한다
 “여기선 안되겠어. 난 꼭 뭘 팔러온 여자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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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비가 내린다. 현악기의 울림처럼 빗발이 부서진다.
가을날 마른 풀밭을 걷고 있는 여자는 섹스를 떠올리게 한다.
누르시오. 힘껏 누르시오. 컴퓨터 자판의 ᄂᄃᄐ이 움직인다.
키보드의 sex는 한글의 ᄂᄃᄐ.
숨죽인 정충들이 체위를 바꿔가며 오디푸스 타락으로 射精.
지붕을 두들기는 빗소리는 소리를 웅크리게 한다. 쉿! 조용히.
모래성처럼 무너지는 라트라비아타의 황홀경.
온몸의 피가 아주 느리게 완행열차처럼 몸 속을 흐른다.
농밀한 욕망이 새처럼 펄럭인다.
리비도에 중독된 새 두마리
여자 한 마리, 남자 한 마리.

☞여관은 꽃숲이다. 꽃무늬 이부자리, 찌그러진 자리끼, 낡은 벽지와 벽지에 새겨진 XXX 전화번호, 두루마리 화장지. 서랍 안 콘돔하나. 뜨악한 섹스 소품들이 처량하다. 누렁이와 꿀 붙는 것을 보았을 때의 쇼크처럼 여관은 충격적인 데코레이션이었다.

사랑도 인스턴트 시대다. 햄버거에 낀 야채토막처럼 사랑도 인스턴트로 가고 있다. 여자는 무드, 남자는 ‘무데뽀’다. 여자의 옷고름은 분위기에 취해야 춤을 추지만 남자는 신호만 주면 지퍼를 푼다. 여자는 노을지는 해변의 테라스에서 문을 열지만, 남자는 냄새나는 여인숙의 골방에서도 오버한다. 여자는 촉각과 후각과 청각에 귀기울이지만 남자는 시각만 충족해도 시시각각 딴 맘을 먹는다. 자동차안에서의 불안한 사랑을 남자는 스릴 있다고 하고, 여자는 누가 볼까봐 겁이 난다고 한다. 구조가 다르고 생각이 다르니 때려죽여도 어쩔 수 없다. 여자는 완행열차고 남자는 급행열차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나재필

술 이야기

忙中日記 2008.10.18 11:46


사진=연합뉴스  글=나재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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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은 야누스다. 술에 취하면 쥐처럼 깐죽깐죽 댄다. 소처럼 느릿느릿 굼벵이가 된다. 범처럼 객기를 부린다. 토끼처럼 약아진다. 용처럼 휘청휘청 댄다. 뱀처럼 느끼해진다. 말처럼 이리저리 뛴다. 양처럼 눈을 깜빡깜빡한다. 원숭이처럼 생쇼를 한다. 닭처럼 오리발을 내민다. 개처럼 개버릇이 나온다. 돼지처럼 먹성이 좋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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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슬픈 우상들은 무시로 술상에서 보냅니다. 이류 대폿집에서 일류 시인의 시집을 한쪽에 놓고 삼류사회의 기득권을 안주삼아 독주를 들이켜던 낭만은 사라졌지만. 비주류(非主流)속 주류인(酒流人)들의 애환을 들여다볼까요. 단, 술을 의인화했으니 '꾼'들은 유념하십시오. 저는 만인의 연인, 소주입니다. 그러나 만인의 적이기도 하지요. 왜냐하면 주인님들의 간을 붓게 하는 '간 큰' 녀석이기 때문이죠.
주인님, 올 연말은 '술술' 찾지 말고 '슬슬' 드십시오. 저도 연말에 보너스 정산이나 받아서 푹 쉬고 싶습니다. 웬만하면 참겠는데 너무 자주 러브콜을 하니 주5일 근무제가 무색해집니다. 뭐! 저야, 주인님의 구절양장으로 흘러들면 그만이지만 주인님의 아픈 간과 헐어버린 똥꼬, 둔해지는 IQ를 생각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올해 저는 주인님의 러브콜을 하루건너 한 번꼴로 받았습니다. 저의 원주인(술공장 사장과 술집 주인)이야 저 팔고 공병 팔아 돈만 챙기면 그만이지만 그래도 술상 앞에 앉은 불쌍한 우리 주인님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주인님, 어제도 엄청 드셨어요. '반죽 좋은' 오버맨을 만나 급기야 오바이트(over+eat)까지 했지요. 전봇대 아래 쏟아놓은 제 육신은 그야말로 주꾸미와 생선 대가리, 밀가루 반죽에 '곤죽'이 되고 육해공군 반찬, 파전에 '파김치'가 돼 처량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술 먹는 '꼬락서니'를 보면 저마저 '취하게' 합니다. 9이닝 내내 강소주 들이켜는 완봉 달인이 있죠, 대단합니다. 웬만하면 마운드에서 내려와야 하는데 똥고집이 장난이 아닙니다. '자타-타타 공인' 철인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요리를 잘한다는 거죠. 커브(옆으로 술잔 돌리기), 직구(1대1 맞짱), 체인지업(폭탄주), 투심패스트볼(차수 변경)로 변화를 주죠. 볼배합(주법)을 달리하고 시간텀으로 몸을 조절합니다. 그 노련한 피칭을 따라가는 약골들은 몇이닝 가지 않아 헛스윙에 녹초가 됩니다. 그러나 말이 완봉이지, 완투에 가깝다고 할 수 있어요. 9이닝 동안 던지다 보면 실점이 따르기 때문이죠. 두주불사하다 보니 주사파(酒邪派)도 생깁니다. 아무리 싼 희석주라지만 저, 그렇게 만만한 놈 아닙니다.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병나발'불고 그것도 모자라 멱살잡이 하는 것 보면 저의 기막힌 드난살이가 억울해집니다. 완투한답시고 10실점하는 괴물은 또 뭡니까. 3이닝 7실점하는 약골과 무슨 차이가 있나요. 방어율이 형편없을 때는 차라리 등판하지 마세요. 감독(술상사)과 선수(술상무)에게 '꼬장'부리지 말고 하루 쉬십시오. 감독이 마운드에서 내려오라고 하는데도 끝까지 던지겠다고 버티다가 결국 사고납디다. '술퍼맨'들이 아주 싫어하는 '선발'입니다.

강판을 당해도 도무지 라커룸(집)으로 향하지 않는 버릇은 또 뭡니까? 주정꾼은 귀소본능이 발달해 있는 법인데 희한한 일입니다. 이런 '투수'들은 꼭 이튿날 자신의 등판을 후회합니다. 헛방을 짚었다는 후회죠. 주인님의 혼 속에서 주소를 잃어버린 폭투(폭음)는 주변 사람들의 혼까지 앗아갑니다. 주인님의 파인더 속 풍경을 항상 시력 1.5로 맞추세요. 게슴츠레한 눈은 옆사람 삼진(골탕먹임)시킬 때 꼬나보는 것(포수와 사인 교환)같아 섬뜩합니다.

그리고 주인님. 제발 저 좀 섞지 마세요. 저 짬뽕 아주 싫어합니다. 그냥 있는 대로 드세요. 어떨 땐 콜라(소콜)에, 환타(소타-양키들이 즐겨 먹음)에, 흔한 경우지만 맥주통(소맥)에 수장시키기도 하죠. 제 동료, 양주야 맥주와 섞으면 '폼'이라도 나지 저는 그야말로 죽음이에요. '소맥'에 빠져 '자맥질'하는 내 모습이 불쌍하지도 않나요? 폭탄주 좋아하는 폭탄인간들, 전 아주 경멸합니다. 결국은 폭탄맞고 장의사차(택시)에 실려 가는 최후를 맞는 꼴이라니. 마치 뉴턴이 고등학생들의 머리를 쪼개고 '법칙의 사과'를 강제로 쑤셔넣는 것 같아요.

또 있습니다. 제발 히야시(冷やし:차게 함) 타령 좀 하지 마세요. 생긴 온도대로 두면 덧나나요? 냉동고에서 덜덜 떨다 보면 입이 쩍쩍 갈라진다고요. 자꾸 그러시면 저도 취하고 싶어집니다. 저를 마구 이용하지 마세요. 세속잡사 잊는 데 동원되고 싶지 않아요. 세상살이에서 구토하고 아파하고 질겁하여 도망치더라도 저를 붙들지 마세요.

봉두난발한 잡념의 오랑캐들이 쳐들어온다 해도 저를 들이붓지 마세요. 비가 오는 날이면 대폿집에서 돼지고기를 썰고 있는 여자를 훔쳐보면서 저를 까는 모습도 싫습니다. 빈 소주병의 외로움을 아시기나 하는건지. 술을 드셔야 술술 풀린다는 세상. 세상살이 박해가 녹아들고 꼬인 실타래가 술술 풀린다고요? 그러나 이닝수를 줄이세요. 경기가 안 좋아 38선이니 사오정이니, 오륙도니 말들 많은 세상 아닙니까? 그러니 건강하기라도 해야죠. 건강진단 때마다 꺼림칙한 기분으로 간장의 감마 GTP수치를 염려하는 일을 되풀이할 수는 없잖아요.

한평생을 70세로 잡는다면 인생의 4분의 1인 23년 정도는 잠을 잡니다. 일하는 시간은 11년이고 여가와 취미로 보내는 시간은 8년, 세탁하고 옷 입는 데 5년6개월, 밥 먹는 데 6년, 교육받고 독서하는 시간 6년, 대화하는 데 3년이 걸립니다. 그렇다면 술 마시는 데는 얼마나 걸릴까요. 1주일에 2번 4시간씩 마시면 1년이면 416시간, 40년을 그렇게 마시면 1만6,640시간, 693일을 마시는 셈입니다. 놀랍죠? 693일. 그것도 헐겁게 잡은 기준이니 몸이 배겨나겠습니까? 술판은 프로와 아마가 마구 뒤섞인 짬뽕그릇 같은 곳입니다. 고급과 저질, 좌익과 우익, 민주와 비민주 철저히 양분된 상술이죠. 그러니 저 같은 술에, 상술에, 조갈증을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연말에는 여행 좀 가야겠어요. 1년 동안 풀가동했더니 제 몸도 녹초가 됐답니다. 스스로를 '쌈마이' '아웃사이더'라고 자학하지 마세요. 술독에 빠져 또 한번 자신의 기억을 잃어버린다면 당신은 패잔병이 됩니다. 망(忘)은 '마음을 잃는다'는 글자이니 기억을 잊는다는 뜻이죠. 한해를 마감하는 뜻깊은 모꼬지. 술잔을 털지 말고 나쁜 기억을 털어내십시오. 이번에는 정말 '억지 없기'입니다.<굿데이신문 게재>

Posted by 나재필


내 안에 나무 한 그루.
텅 빈 육신에 삼투압을 하고 그 든든한 뿌리로 인해

비바람에도, 환절기에도 고뿔 앓지 않는,

육신의 뿌리는 세상 밖을 향해 뻗고

때론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쑥쑥 자라

마음의 두께마저 뚫어 웃자란다.

나무는 근육질의 나이테를 벗어나

섬약한 지성의 가지를 일깨우고

무지와 교만의 바이러스를 치유하는

손 페티스트(fetishism).

내가 껴입은 남루한 육체의 옷은

치명적 상처로 수차례 수액주사를 맞았다.

독살스러운 세상의 비수에 꽂혀

독 오른 뱀 대가리처럼 솟아오른

연리지(連理枝)를 부러워한다.

두 나무 한 몸.

홀로 자랄 공간도 모자란 데

언제 내 몸에 들어왔을까.

하나가 병들기 전에 한 몸으로 붙었으니

흰 꽃을 피웠으면 흰 꽃으로 피고

붉었다면 붉은 꽃으로 피어나네.

생장 멈추어도 다리 떼고 벗어나지 마.

밤새도록 비정한 벌목해도 도망치지 마.

내 안의 나무 한그루, 내 안의 남루한 수목원이여.


*연리지(連理枝) = 두 나무의 가지가 서로 맞닿아서 결이 서로 통한 것



☞집 앞에 있던 미루나무는 유년시절의 유일한 말동무였다. 10m가량 되는 미루나무를 힘겹게 올라가서는 Y자 가지에 타고 앉아 경치도 보고 나무와 팔푼이처럼 얘기도 나누고 책도 읽었다. 마음 비운 나무는 고개를 끄덕이듯 가지를 절레절레 흔들며 답례했다. 외딴 집 미루나무, 좀더 높은 곳에서 멀리 보고 싶은 욕망의 높이였던 것 같다. 처음엔 그 높이가 두려워 벌벌 떨기도 했지만 나중엔 원숭이 나무 오르듯 눈감고도 Y자 둔덕을 찾아냈다. 그런 고마운 친구에게 한번은 몹쓸 짓을 했다.

 "나무야, 외로워…. 외롭거든…."

 조각칼로 나무에 낙서를 한 것이다. 비정한 칼질을 했던 것이다. 아프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일년 후 그 나무 위에 다시 올라갔을 때 상처를 확인하고는 깊은 상심에 빠져버렸다. "나무야…"가 "ᄂᄆㅑ..."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그 상처 그대로 글자가 커버린 것이다. 흐릿했지만 마치 "야, 임마" 처럼 보였다. 그 후 그 나무에 오르지 못할 정도로 내 키가 커져버렸을 때 그제서야 후회를 했다. 그러나 후회는 곧 까맣게 탔다. 이미 그 나무는 상처를 안고 피고름을 짜내며 나이테를 몇 개나 더 만들었을 시간이 지났으니까. 나이가 들면서, 나무가 크면서, 그 곁을 지나면서 많은 시간동안 나무에게 사과해야만 했다. 이후 나무를 사랑하게 되었다. 나무를 좋아하는 것은 나무한테는 귀만 있지 입이 없는 까닭이다. 말이 없이 묵묵히 들어줄 뿐이다. 상처주지 않는 조용한 귀거래사. 한번 밑동이 잘린 나무는 이듬해 잘린 그루터기에서 많은 곁가지들이 내뻗친다. 그러나 그 곁가지가 자라서 다시 나무가 되는 법은 결코 없다. 그냥 곁가지 일뿐이다. 오히려 그 곁가지는 눈엣가시여서 전지가위로 싹을 잘라준다. 그래야 튼실한 하나의 가지가 더 굵고 튼튼하게 자라기 때문이다. ‘곁가지’란 말을 흔히들 쓰는 것도 무용지물에서 비롯됐으리라. 나무도 뿌리채 다른 곳으로 옮겨 심으면 한동안 몸살을 앓는다. 나무 옮기는 일도 예삿일이 아니다. 온 몸 가득 상처를 남긴다. 바람에 스치어도 상처가 남을진대 뿌리까지 건드리면서 이사 가는 일은 강풍에 휘둘리는 일이다.

과수원집 아들은 좋은 사과를 못 먹는다. 썩은 사과만 먹는다. 벌레 먹은 과일이 맛있다는 말은 사실이다. 꿀 먹은 과실에 벌레가 꼬이고 새가 꼬인다. 그 놈들은 아주 정확히 찾는다. 쪼아대며 찾아내기도 하지만 향기와 모양새만 봐도 단방에 좋은 과실을 찾아낸다. 그래서 더 얄밉다. 시원찮은 것을 먹으면 눈감아 줄진대 그들은 상품이 될만한 것들만 건드린다. 무서운 헌터다. 물론 김남주 시인처럼 ‘찬 서리/나무 끝을 나는 까치를 위해/홍시하나 남겨둘줄 아는/조선의 마음이여’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얄밉도록 생존의 씨알을 먹어버리는 놈들을 곱게 봐주기엔 먹고 살기가 빠듯하다. 때문에 비닐을 두르고 천을 두르고, 이제는 화약총과 새총에 폭죽, 엽사들까지 동원된다. 이러다간 대포까지 등장하지 말란 법은 없을 것이다.

나무와 바람은 친구다. 나무가 바람에 스치면 비 오는 소리가 들린다. 귀를 대고 소곤 되지 않아도 된다. 그냥 눈만 감으면 들린다. 아득한 곳으로부터 아주 가까운 곳으로 소리는 전율한다. 그 숲 소리, 그리고 그 나무들의 우듬지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보라. 나무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향기의 미묘한 흩날림 속에 소리는 깊어간다.
1온스의 장미향을 얻기 위해서는 1톤의 장미가 필요하듯 나무와 바람의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진득한 기다림이 필요하다. 나무와 바람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일년에 0.5센티미터씩 굵어지는 소나무의 깊은 앓이를 이해해야 한다. 소나무가 무게에 겨워 적설을 덜어내는 소리를 보고 남의 손을 이해해야 한다. 남의 손에 얹어있는 삶의 무게를 느껴야 한다. 남의 손이 지쳐 보일 때 손을 잡아 주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나무를 사랑하는 첫걸음이다.

대나무는 좀처럼 꽃이 피지 않지만 꽃이 필 경우에는 모든 대나무 밭에서 일제히 피어 대나무 스스로의 영양분을 모두 고갈시켜 말라죽어 간다고 한다. 거룩한 고갈, 무서운 소진이다. 대나무는 속이 텅 비어 하
루 여덟 자나 자랄 수 있다. 비울 수 있기에 채울 수 있는 것이다. 추웠던 겨울을 겪지 않은 나무가 봄볕의 고마움을 알리 없고, 고약한 거름까지도 나이테 깊은 곳까지 빨아들일 줄 모르는 나무가 생장할 리 없다. 어떠한 햇살도 절반은 응달이다.  응달을 이겨내야만 잘 자라는 법을 터득한다. 비바람이 불어도 한파가 몰아쳐도 그것을 이겨낼 그릇이 있어야 한다. 대나무의 '비움'은 고난을 받아들일 삼투압의 자세가 돼 있기 때문이다. 텅텅 공명통 소리를 내며 바람을 껴안고 바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들에게서 피리소리가 나는 것은 바람을 품었다는 신호다. 세상풍파를 견딜 수 있는 바람의 아들이기에 소리가 기운찬 것이다.
아, 바람맞는 나무여. 나무속의 바람이여.

Posted by 나재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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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어의 꿈

忙中日記 2008.10.01 13:23

비늘이 꿈틀거리고 심장박동소리가 둥둥둥.

고삐 풀린 어죽처럼 서성대는 발걸음.

생선가게 들러 청어(靑魚) 한 마리 사다.

청어는 문병 가는 사람 마냥 힘이 없다.

황인종에 잡힌 등 푸른 魚선생.

36.5도의 인간을 위해 희생한 365일의 여정.

집어등에 잡혀 내내 눈물만 흘렸으리.

희망보다 더 큰 꿈의 지느러미 파닥거리며

미지의 대양을 헤엄쳐 온 수고가 물거품 되었으리.

해풍 잔뜩 머금은 생선 한 마리 세상의 입안에서 파닥거린다.

부러진 돛은 절망으로 나풀대고 물컹한 살집은 피비린내로 그득하다.
물 고 기….

인간의 아가미서 살육된다.

그물코에 까무러친 바다의 꿈.

해풍이 그리울 청어.

그 청어의 바다를 생각하니

혈관 속에서 파도가 일렁인다.

멀미가 난다.


동물인 인간은 말한다. “우리는 양떼를 미워하지 않고 사랑한다. 양고기는 무지하게 맛있다”고. 요즘 사람들은 다 잘 먹고 잘산다. 예전에는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해 못 먹고 못살았다. 아니 쌀이 없어 시래기나 풀을 많이 먹으니 똥구멍이 찢어질 수밖에.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해 변비가 걸렸지만 지금은 기름진 음식을 너무 많이 먹어 똥구멍이 찢어진다.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이제 못 먹고 못사는 것만큼이나 아프다. 화려한 가난, 화려한 문명이다.


인천 월미도에서 영종도로 가는 유람선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이 있다. 바로 괭이갈매기의 새우깡 받아먹기 서커스. 괭
이갈매기는 부역을 하지 않는다. 고기 잡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에 그들은 앵벌이를 한다. 새우깡과 건빵이 그들의 먹이다. 그들의 입은 철저히 인스턴트에 길들여져 있다. 그들의 어미와 아비도 여객선 뱃머리서 던져주는 건빵과 새우깡으로 배를 채운다. 때문에 어린 새에게 고기를 잡는 방법을 전수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 자식들은 배꼬리를 따라 날며 앵벌이를 한다. 몇 번을 찾아 유람했는데 그들은 늘 앵벌이를 했다. 배고픈 아이에게 물고기를 주지 말고 낚시하는 법을 가르치라는 탈무드의 근로지침은 그 곳에 없었다. 고기를 잡으면 투망을 잊는다. 한 두 번 볼 때는 상당한 개인기라고 생각했는데 보면 볼수록 슬펐다. 그들은 왜 어미에게서 고기 잡는 법을 배우지 않았을까. 대대손손 그들은 새우깡 받아먹는 법, 건빵을 놓치지 않고 낚아채는 법을 배웠을 것이다. 새우깡도 먹어보니 새우 맛이 난다던 어미의 가르침을 배웠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물고기는 바지런하다. 물고기는 잠을 자면서도 눈을 뜨고 있다. 풍경(風磬)은 부지런한 그 물고기 형상을 단순화 한 것이다. 물고기처럼 언제나 깨어있으라는 ‘소리 없는 법문’이다.

Posted by 나재필

외딴 집

忙中日記 2008.09.22 20:30

외딴집은 밤이 길다. 어둠이 빨리 찾아들고 아침이 늦게 온다. 새벽은 밭은기침을 하고 아침은 외로운 몸살을 앓는다. 우리 집은 25여 년 간 외딴집이었다.

남들은 대낮 같은 백열등을 쓸 때 우리 집은 등잔불을 썼다. 남들이 TV볼 때 우리 집은 라디오를 들었다. 남들 전자레인지 쓸 때 우린 석유풍로를 썼다. 남들 냉장고 쓸 때 우린 통풍 잘되는 곳에 야채를 놓았다. 보일러 대신 우물물을, 연탄불 대신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외딴 집에 불을 밝히려면 전봇대 값을 개인이 지불해야 했기 때문에 전기를 놓을 수가 없었다.

너무 무서우면 눈물도 나지 않는다. 너무 두려우면 오히려 겁이 없어진다. 너무 두려우면 되레 독해진다. 외딴집 2km 근방에는 아무도 살지 않았다. 가로등도 없었으며 인기척도 없었고 불빛도 없었다. 그저 어둠, 어둠…. 어둠 속에 징그러운 두려움만이 웅크리고 있을 뿐, 빛이라고는 없었다. 켕기는 두려움…. 간당간당한 두려움을 안고 살았다.

부모님이 부재중일 때 난 혼자 남겨졌다. 불 꺼진 집, 혼자 남은 외딴 집은 두려웠다. 도피할 수 없는 유배지였다. 공포의 감옥 같았다. 그래도 혼자 어둠을 깔고 앉아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밥을 짓고 소죽을 끓이고 개밥을 주었다. 그리고는 방안에 들어가서는 주먹만한 자물쇠를 걸어 잠그고 두려움을 잘근잘근 씹었다. 밖에서 부스럭 소리만 나도 이불을 뒤집어쓰고 부모님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것도 안 되면 손전등을 켜들고 마을 정류장으로 마중을 나갔다. 차라리 버스를 기다리며 멀뚱히 서있는 게 마음 편했다.

 버스가 지나가는 것을 한대, 두 대, 세대…. 셈을 세면서 멀뚱히 있다보면 반가운 ‘아군' 부모님이 오셨다. 버스 계단을 밟고 내려서는 모습을 보면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버지의 손에는 항상 센베과자나 모나까, 웨하스, 찐빵, 호두과자, 알사탕 봉지가 들려있었다. 마치 두려움을 이긴 것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는 것처럼. 봉지를 받아든 난 저간의 공포는 까마득하게 잊고 군것질에 몸이 달아올랐다.

 수안보에서는 커다란 개울물을 사이에 두고 외따로 살았고, 제천에서는 높다란 산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살았다. 낮이 되면 마을사람들이 농사일을 하느라 집 근처 논밭에 한둘 나타났다. 사람이 반가웠다. 사람냄새가 좋았다. 사람이 나타나면 나도 모르게 손을 까불며 인사를 했다. 사람과의 손 인사가 정겨웠다. 그들은 이웃이었지만 산 너머 이웃이었다. 밤이 되면 없어지는 이웃이었다. 한 때는 ‘우리 집에 무슨 큰일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외롭게 크면 눈물도 많아진다. 별거 아닌데도 서운하고 외로워진다. 도회지에서 친척들이 오면 저마다 한결같이 ’별장 같다‘고 했다. 신천지 같다고 했다.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속에서 이름 모를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한가한 소리였다. 간만에 유희 삼아, 도락 삼아 놀러오면 분명 낭만적인 풍경일 것이다. 얄미운 사람들 같으니라고. 등잔불의 그을음, 등잔불에 타던 그리움, 그 그리움의 발원지, 그리고 그 어린 마음에 겹겹이 상처로 피어오르던 그을음은 아프고 시렸다.


 그 후 몇 년이 흐른 후 전봇대 세 주를 사비(私費)로 박고 우리 외딴 집은 광명을 찾았다. 전기가 들어오고 냉장고와 TV가 들어왔으며 밥을 하더라도 전기밥통이 있어 밥이 식지 않았다. 그러나 요즘도 부모님은 전기를 아끼신다. 틈만 나면 소등하고 웬만해서는 점등하지 않는다. 늘그막에 시작한 아파트 생활도 대 만족이라고 하신다. 왜냐하면 문명의 편리함이 아파트에 절절히 흐르기 때문이다. 옛 전원생활이 그립지 않느냐고 가끔 물으면 대답은 간단하시다.

“징그럽다, 징그러워….”

Posted by 나재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