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투데이 6월11일 1면>


아래 글은 한국편집기자협회보에 게재했던 칼럼이다. 언제 썼는지 까마득하게 잊었는데 우연하게 인터넷서핑을 하다가 찾았다. 단순한 따옴표(돼지발톱) 하나에도 진정한 가치가 숨어있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생각하고, 생각하며 '느낌표'처럼 사는 인생사에서 '따옴표'는 하나의 진실찾기다.


신문은 느낌표여야 한다.
독자들에게 무언의 메시지를 줄 수 있어야 한다. 보고 읽으면서 느끼게 해야 한다. 그런데 느낌(feel)을 주어야 할 신문들이 따옴표로 물들고 있다. 따옴말이나 문장에서 특별히 드러내는 말의 앞뒤에 쓰는 큰따옴표 (“ ”)·작은따옴표(‘ ’)가 남발하고 있는 것이다. 큰따옴표는 사람의 말을 인용하거나 문장에서 따올 때 쓰이고 작은 따옴표는 따옴표 안에 다시 따온 말을 나타낼 때나 마음속으로 한 말의 내용을 나타낼 때, 또는 문장에서 특별히 드러내는 말의 앞뒤에 쓰인다. 일명 돼지발톱, 69(육구)라고도 불린다.
그런데 마땅히 쓰여야 할 용도 외에 편법으로 애용되고 있다. 편리한 자기방어다. "밤새 안녕"을 위한 자구책이다. 신상의 발병이 두려워 작은따옴표로 단단히 묶은 뒤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놓는 것이다. 작은따옴표에 묶인 상대편에서 뭐라고 항의하면 돼지발톱을 사용했는데 왜 그러느냐고 되레 항변한다. 사정이 이러다 보니 웬만하면 (‘ ’)고 모호하면 (‘ ’)다. 지면들은 서너 개의 (‘ ’)돼지발톱들이 산만하게 찍혀있다. 그 것들은 책임회피의 슬픈 흔적이고 면피용 자국이다. 작은따옴표는 큰 상처다. 일단 쓰고 보자는 식의 폭로 저널리즘, 확인 없이 그대로 베끼는 저널리즘의 폐해다. 때문에 이런 저간의 상황들을 아는 사람들은 따옴표 신문, 따옴표 편집을 질타한다.


 어느 老선배는 이랬다. "편집은 연날리기와 같다. 팩트(fact)에 줄을 매고 가장 높이 날리는 것이다. 단, 줄이 끊어져 연이 날아가 버리면 그건 제목이 아니라고."

 다른 怒선배는 이랬다. "자고로 편집은 병 속의 새를 꺼내는 것이고 지면 속에는 자신의 몸뚱이가 들어가 있어야 한다"고.

팩트를 강조하고 책임을 강조하는 말들이다.
사실을 곡해하는 기사와 편집은 종이매체의 위상을 뒤흔드는 작은 요소다. NO를 NO라고 하는 것은 편집자의 자존이다. 책임에 대해서 NO하는 것은 ON을 끄는 것이다. 깨어있음을 포기하는 것이다. 작은따옴표(‘ ’)로 묶는 것은 결국 스스로를 포박하는 것과 같다. 편집은 뉴스 핵심의 포착-압축, 그것의 표현-전개라고 한다. 편집 사활의 관건은 환경보다 내부에 있다. 한 줄의 제목일지라도 쉽사리 생각하지 않고 책임과 의무를 다할 때 지면은 빛난다. 돼지발톱(‘ ’)이 없는 지면이 깨끗하고 곧아 보이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적확하게 쓰고 남발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Posted by 나재필

몇병을 마셨을까!! 몇병을 마셨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동공으로 봐서는 참 행복하게 술을 마셨다고 단정할 수 있다. 모처럼, 아니 1년만에 대선배님들을 만나서 회포를 풀었다. 한국언론재단 교육을 끝내고 뒷풀이 현장에서. 왼쪽부터 한인섭 전 굿데이 편집국장, 이상국 전 중앙일보 편집데스크. 가장 '빛나는' 머리를 보이고 있는 자가 필자다.


안경 세 개, 그리고 얼굴가득 번진 미소. 행복했다. 1년만에 유성서 다시 만나 술자리를 했다. 한인섭 국장은 편집을 알게 해주고, 편집을 사랑하게 만들어준 은사다. 이상국 국장은 2~3번 술을 마신 사이지만 누구보다도 편집을 사랑하고, 편집을 사랑하도록 만드는 사람이다. 이 둘을 동시에 만나 어깨동무를 하고, 쓴 소주를 달콤하게 마실 수 있는 것은 행운이자 고마움이다. 두사람, 특히 한인섭 국장을 만나며 내 인생은 여러번 업그레이드 됐다.(마음속의 멘토). 이날 우리는 수백번 '편집' 얘기를 했고, 미래를 얘기했고, 그 미래속에서 희망을 찾았다.

"집필하신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책은 나왔나요?"
"벌써 나왔지. 그런데 비매품이야. 후배 통해서 책을 전달하마"
한인섭 국장은 얼마전 한국언론재단과 한국언론교육원이 발행한 '신문편집 DNA'를 발간했다. 이틀 뒤 회사에 출근해보니 자필사인이 들어있는 책자가 와 있었다. 편집에 대한 무한사랑으로 가득한 님의 텍스트를 보며 가슴이 멍멍해졌다.
책자에 나와있는 한 국장에 대한 소개글.
한인섭 국장은 강원일보, 매일경제, 국민일보, 경향신문,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굿데이신문 대표이사, 언론재단 겸임교수. 사진을 좋아하고 영화와 개그프로를 즐겨본다. 사진은 프레임 속에 새로운 공간과 질서가 탄생되는 경이로움을 체험하게 해준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만 보면 무릎을 꿇고 싶고, 앤셀 아담스의 흑백사진엔 늘 현기증을 느낀다. 고기잡이(낚시, 천렵)를 좋아한다. 불교신자였던 어머니가 방생한 물고기는 다시 다 잡아들인듯하다. 고기 기르기도 좋아한다. 한때 아마존강에만 서식하는 환상적인 물고기인 ‘디스커스폐인’을 사랑했다. 그들의 우아한 몸놀림과 그윽한 눈빛을 읽다보면 새벽동이 트곤 했다. 게임도 가끔은 내게 새벽을 맞게 했다. 손은 느리지만 스타크래프트로 우주를 지키고 스페셜포스로 나라를 지켰다. woodworking(목공)은 내게 아주 오래된 취미인데 다양한 질감의 나이테로 공간을 창조해내는 작업과정은 편집처럼 설레임에 들뜨게 한다. 모두 그 나름대로의 소중한 쓰임새를 갖고 있는 목공구들은 만져보는 것만으로도 그 솔직함에 행복하다. 편집 때문에 담배를 끊었다가(편집 스트레스로 인한 ‘지나친’ 흡연 때문에) 편집 때문에 다시 피워(‘지나친’ 편집스트레스를 해소하려고) 지금까지 끊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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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대 가장 대표적인 신문편집의 대가 함정훈 님(전 국민일보 편집국장․현 한국홍보포럼이사장)이 말하는 '편집愛人' 한인섭이다.
“신문 100년은 편집 100년이다… 그는 편집의 비극은 신문의 비극이라고 외친다. 그는 90년대 젊은 신문 국민일보에서 새 신문 다듬기에 함께 울력다짐하다 스포츠신문으로 갔다. 2002년 월드컵 편집상 시상식장에서 만났다. 4강신화의 필드에 히딩크가 있었고 편집마당엔 그가 있었다. 그의 편집은 위트 넘치는 아나그램 등 다양한 조어 구사로 월드컵 환호에 장외 치어리더로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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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섭 국장은 말한다.
"이것이 편집이다라고 단정짓는 순간 그것은 이미 편집이 아니다. 편집은 지식으로 정복할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편집은 신문의 시작이자 끝이다. 편집이 쇠락하면 신문이 쇠락한다. 이 두 개의 일치하는 하향곡선에 우리는 이미 접어들었는지도 모른다. 취재기자만 키우는 데 급급하고 편집기자를 키우는데는 소홀히 해온 CEO들도 반성할 일이다."

대선배들을 재회한 그 날 난 무한의 에너지를 다시 얻었다. 나태해진 삶의 끈을 다시 조였다. 사랑해야만 했던 편집, 사랑하게 된 편집, 사랑할 수 밖에 없었던 편집, 사랑을 계속해야만 할 편집을 기억의 뒤켠에서 다시 끄집어낸 것이다. 나로 말미암아 세상이 변하진 않지만, 나는 거기에 서 있고, 또 그것을 향해 뛴다. '편집'이 글을 쓰도록 가르치고, '편집'을 게슴츠레 하지 않도록 가르친 한 국장이 없었다면 '일과 인생'이라는 그 어떤 부문에서도 '하등한 삶'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라 단언한다. 감사함을 전한다. 
<두 분의 허락을 받지 않고 글과 사진을 무단게재하게 됨을 용서바라며>

Posted by 나재필

 누군가가 나에게 카메라를 들이대면 난 질겁한다. 화를 내지는 않지만 '도망' 다니기 바쁠 만큼 피사체가 되길 거부한다. 누군가의 파인더에 내 모습이 찍히는 게 그냥 싫다. 아마도 세월의 바람소리에 머리숱이 한 올 한 올 날아가기 시작한 뒤부터였을 것이다. 그런데 사진 찍는 것, 사진 찍히는 것을 싫어하다보니 안좋은 게 있다. 가장 큰 단점은 '추억의 저장고'가 없다는 것이다. 아주 아름다웠던 추억도 머리속에 글 몇 줄짜리 풍경밖에 남아있지 않게 된다. 오늘 입수한 이 사진들도 편집기자들이 중국 북경 유람을 하던 때인데 나에겐 '머리속의 지우개'처럼 새하얗기만 했던 노정(路程)들이다. 왜냐하면 5일간 단 한 장의 사진도 찍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오며가며 몇 장 찍혔을 뿐이다. 오늘 우연히 그 '추억'을 찾았고 다시 그 때로 돌아가 전국 팔도에서 모인 그리운 얼굴들을 다시 보게 됐다.

 사진 찍히는 게 싫다해도 야구선수 김병현 정도는 아니다. 몇년 전 모 신문사에 있을 때 같은 회사 사진부 기자가 김병현에게 맞아 1면에 대서특필된 적이 있다. 이유는 '왜 사진을 맘대로 찍냐'는 거였다. 코뼈가 주저앉는 폭행이었는데 참 황당하고 괘씸했다. 모두가 김병현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겠노라고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사진 찍히는 게 싫어도 폭력을 휘두를 정도면 '돌+아이'다.


동영상=naver편집기자 꽃다방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사진 보는 것은 즐긴다. 물론 나름, 사진 보는 안목도 있다고 자조한다. 남이 찍어놓은 사진은 커다란 인생공부다. 찍는 이의 생각, 찍고자하는 상황이 필름 속에 고스란히 배어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역사일 수도 있고, 사랑일 수도 있고, 흔적일 수도 있다. 잊혀진 추억의 일기장을 들추어보는 듯한 애틋함이 있어 좋고, 항상 그 시간 그 때로 돌아가서 보는 '늙지 않는 정물화'가 있어 좋다. 그 흑백의 공간은 영원히 늙지 않는 피사체다. 아무리 색이 바래도 그 젊었던 표정과 미소는 늙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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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의 다양한 얼굴, 그리고 한국기자들의 다양한 얼굴. 다시보니 새롭다. 그런데 문제는 또 있다. 오며가며 찍혔는데 사진 속의 장소가 어딘지 헷갈린다. 기억의 프리즘을 온통 뒤져봐도 잘 떠오르지 않는다. 기록하지 않은 탓이다. 피사체를 직접 찍고 마음 속에 넣어 복기하지 않은 탓이다. 북경의 짝퉁빌딩 앞 노천(모자 쓴 놈팡이가 나)에서 찍은 것만은 분명하다. 비루먹을! 사진을 직접 찍지않으니 추억도 뒤엉켜 내가 서 있던 주소를 잃어버린다. 기억에도 '고장'이 생기는 법이다.


 사진의 출처는 편집기자들 사이에서 유명한 '꽃다방'이다. 무단으로 퍼왔음을 고백하며 진심으로 사과드린다. 더불어 감사드린다. 잊혀져가는 추억을 다시 찾아줘서. 사진은 여행의 동반자다. 넓게 말해서는 '인생노트'다. 그것이 있기에 늙지 않는 시간을 만날 수 있고 탱탱한 젊음을 기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나간 시간을 복기하며 후회하지 않을 삶을 준비할 수 있다. '사진'에게 감사한다.
P.S 본의아니게 초상권도 침해했다. 이 또한 너그러운 마음으로^_^
 
 사진 잘 찍는 방법
 사진을 잘 찍는 방법은 인터넷과 책자에 다 나와 있다.^-^
 다만, 내가 생각하는 것은 상식적인 것들이다. 사진을 찍을 때 가장 중시해야 할 것은 첫째도, 둘째도 포커스(FOCUS.초점)인 듯하다. 풍경을 찍을 것인지 디테일한 표정을 찍을 것인지 먼저 생각해야 한다. 파인더에 들어온 피사체를 조각조각내어 찍고자 하는 '마음'을 선택해야 한다. 풍경이든지, 표정이든지 두가지 모두 욕심을 내기 보다는 한 쪽에 무게중심을 둬야 한다. 둘 다 살리려다 둘 다 망친다. 표정을 짓도록 강요해선 안된다. 연출된 사진은 보는 이도 부담스럽다. 웃어줘야 할지, 뒤돌아서서 비웃어야 할지...노출과 촬영모드 등은 똑딱이 카메라도 잘 나오니 초보자에겐 포커스, 포커스가 가장 중요한 듯싶다. 이상은 선무당의 말씀^-^
Posted by 나재필


리스본 서쪽 28km 지점에 있는 사계절 휴양지 카스카이스(Cascais)는 왕실의 여름휴양지로 유명하고 포르투갈 출신 축구선수 호날두의 저택이 있는 곳이다.

 ▶서울서 몇개의 국경을 넘다
 서울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까지는 약 9000km 거리다. 790km의 속도를 유지하며 3만 3000ft(1만1300m) 고도로 11시간 30분을 가야 한다. 시간은 거꾸로 먹는다. 오늘을 살았는데 국경을 넘으며 어제를 다시 살게 된다. 대한민국보다 8시간이 늦다. 그 시간은 국경만 넘는 게 아니라 신체의 디테일한 감각까지도 집어삼킨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가기 위해서는 중국대륙과 몽골, 카자흐스탄, 시베리아, 러시아 우랄산맥을 넘어 모스크바-함부르크-베를린-파리의 창공을 스쳐지나가야 하는 여정이다. 중국-티베트의 차마고도가 바로 하늘 위에도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장장 2만 5000km를 이동하는 대장정. 대서양과 지중해, 북해를 두루 거쳐야 하는 고된 여정이기도 했다. 서울에서 포르투갈까지 가는 직항로는 없다. 때문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스키폴 국제공항을 경유해야 한다. 서울서 암스테르담까지는 장장 8906킬로미터.(서울서 부산까지 거리가 약 420km). 물론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을 가기 위해서는 스페인 마드리드를 경유해야 하는데 암스테르담에서 마드리드까지만 해도 1418km를 다시 가야 한다.


성모마리아 교회엔 희망봉을 돌아 인도항로를 발견한 바스코 다가마의 관과 대항해시대 포르투갈의 활약상을 서사시로 읊은 국민시인 루이스데 카몽이스의 관이 나란히 있다.

 ▶포르투갈
 유럽 서단(西端)에 자리잡은 포르투갈(조용한 항구란 뜻)은 우리의 관심밖에 밀려 있는 나라의 하나다. 포르투갈의 콜럼버스보다 수십년이나 앞서 엔리케 왕자는 망망한 수평선 저 너머에 새로운 세계가 있음을 확신해 세계 최초의 해양학교를 건립했다. 콜럼부스도 이 해양학교를 나와 아메리카 대륙 발견의 신기원을 이뤘다. 일본에 최초로 발을 디딘 서양인이 이들 포르투갈인이었고 카톨릭교와 서양식 무기도 전해 주었다. 조총도 그들이 전해 준 것으로 왜군이 조선침략이라는 무모한 계획을 세운 것도 활보다 우수한 신무기 조총이 있었던 탓이다.

 제로니무스 수도원은 16세기 포르투갈 전성기의 영광을 대변하는 곳이다. 이 거대한 수도원은 바스코 다가마가 해외원정에서 벌어온 막대한 부를 이용하여 건설했다고 한다. 대지진에도 손상을 입지 않고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까보다로까(Cabo do Roca․로까 곶)는 우리나라 해남처럼 땅끝마을이다. 유럽 서쪽 끝에 위치해 있고 대서양이 반달형 모양으로 펼쳐져 있어 ‘지구는 둥글다’는 학설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리스본 서쪽 40km에 있으며 우리나라와 같이 북위 38도 47분에 걸쳐져 있다. 포르투갈 서사시인 카모잉스(Camoes)는 이곳을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곳이라고 표현했다.

 ▶스페인
 스페인의 3대 화가로는 벨라스케스, 고야, 그레코가 있고, 성악가로는 호세 카레라스, 플라시도 도밍고(도밍고는 일요일이란 뜻)가 있다. 스페인에만 세계문화유산 등록문화제가 41개에 이를 정도로 볼거리가 많다. 스페인은 행복 이미지, 스마일 이미지를 내세운다. 그들은 불법이민자에게도 의료보험 혜택을 무료로 준다. 암에 걸리면 보건소에 갈 정도로 일반 병원보다 시설, 장비가 뛰어나다. 하몽은 돼지다리를 염장질해서 땅에 묻어 삭혔다가 말려서 먹는 것인데 술안주로 좋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항상 공수해서 먹을 정도였다고 한다. 스페인은
포도, 오렌지, 올리브 생산 1위 국가다. 낙천적이고 놀기 좋아하는 성격탓에 소방관들은 하루 일하고 4일을 쉰다. 쉬는 것도 인프라로 생각한다. 월화수는 술을 안마시고 목금토는 밤새워 마신다. 술먹는 날도 퇴근후 집에서 밥을 먹고 나와 술을 마신다.(외식값이 비싸기 때문). 레알 마드리드 구단주는 장관급이며 선거땐 중계방송을 할 정도다. 은행 건설 주식등에 투자해 구단은 적자지만 사업은 흑자다. 축구를 하지 못하면 스페인서 살아남지 못할 정도로 광적이다.

 스페인을 알려면 이사벨 여왕을 알아야 한다. 이탈리아 탐험가 콜럼버스는 이사벨 여왕의 후원을 받아 항해를 떠났다. 3차에 걸친 항해 끝에 쿠바, 아이티, 트리니다드 등을 발견했다. 그의 서인도 항로 발견으로 아메리카대륙은 유럽인들의 활동 무대가 되었고, 에스파냐가 주축이 된 신대륙 식민지 경영도 시작되었다. 콜럼부스는 몰락의 길로 가고 있던 스페인을 살린 국민 영웅이고 아직까지도 최고로 추앙받고 있다.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스페인 세비야까지는 450km로 버스로 6시간이 걸린다. 고속도로는 유럽연합에서 돈을 내서 건설됐다. 포르투갈의 땅은 황량하고 국경을 넘으면 스페인은 비옥하다. 마치 옆집 가듯 검문검색없이 국경을 통과한다. 세비야는 ‘빛의 도시’란 뜻이다. 세비야 대성당은 유럽에 있는 성당 중 세번째로 큰 성당이다. 1402년부터 약 1세기에 걸쳐 건축되었고, 중세기 왕들의 유해와 콜럼부스의 묘가 있다.

스페인 광장인데 영화 '로마의 휴일'에 등장하며 유명세를 탔다. 김태희의 LG텔레콤 CF와 한가인의 롯데카드 CF를 여기서 찍었다. 그 자리에 와이프가 서 있다.

 


 ▶모로코
 모로코는 ‘해가 지는 도시’란 뜻으로 지중해의 꽃으로 불린다. 스페인 알헤시라스에서 지브롤터 해협을 거너면 모로코 탕헤르에 도착한다. 카페리호로 1시간 20분쯤 가야 한다. 유럽과 대서양을 끼고 있어 지리적 인프라가 좋다. 앞에 보이는 카페리호는 버스와 승객을 실어나른다. 'e' 표시가 돼 있는 게 내가 탄 버스인데 모로코 밀항객을 태우기도 한다. 모로코는 스페인으로 오기 위한 밀항이 많다. 고무다라나 아이스박스를 타기도 하고 버스 차체 밑에 있는 시다바리(정비하기 위해 만든 공간)에 숨어 밀항을 시도한다. 3명이 붙잡히는 걸 목격했다.

모로코 탕헤르는 침침한 어둠의 도시다. 사람들 표정하고 건물하고 모두가 삭막하다. 밤거리도 돌아다니기 겁난다. 회교국가이기 대문에 술을 먹지 않는다. 다만 지나가는 동양인을 뺄꼼뺄꼼 쳐다보는데 기분이 유쾌하지는 않다.

 모로코는 분위기가 터프하고 냄새로 유명하다. 햇볕이 좋아 화면(사진발)이 잘 나온다. 글래디에이터를 만든 리들리 스콧 감독이 가장 좋아하는 곳이다. 그들도 노는 것을 좋아하고 천성이 게을러 토요일과 일요일은 무조건 쉬고 금요일은 회교사원 가는 날이기 대문에 또 쉰다. 모로코 고도(古都) 페스는 9400개 골목으로 이루어진 중세도시로 가죽염색공장으로 유명하다. 카사블랑카(하얀 집이란 뜻)는 모로코의 최대 도시인데 영화 '카사블랑카'엔 한 컷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들은 엉뚱하게도 다른 나라에서 영화를 찍었다. 모로코 대표음식은 꾸스꾸스다. 좁쌀을 쪄서 바닥에 깔고 그 위에 각종 야채와 고기를 얹는다. 소스(고기를 끓인 국물)를 곁들여 홉스(빵)와 함께 먹는다. 1인분에 7만원 정도 하는데 별로였다. 모로코에서 금요일에 대부분 가정에서 꾸스꾸스를 먹는다.

사진 초점이 흔들려서 무희의 얼굴이 별로로 나왔다. 하지만 현장에서 봤을 때 그녀는 정말 섹시하고 이뻤다. 모두들 넋을 놓고 보았다. 보통 댄서들의 몸짓은 강렬한데 그녀는 벨리댄스를 하듯 요정의 춤사위를 보여줬다.

 스페인 그라나다의 알바이신은 플라멩코의 촌락이다. 
스페인 남부의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예부터 전하여 오는 민요와 춤. 기타와 캐스터네츠 소리에 맞추어 손뼉을 치거나 발을 구르거나 하는 격렬한 리듬과 동작이 특색이다. 스페인 사람들의 정열이 집시의 몸을 통해 분출된다. 관능을 훔치는 무희의 미소, 탭댄스들의 몸놀림은 마음을 유혹한다. 그것은 그들의 恨의 표현이다.

 ▶다시 스페인

사진위는 여행내내 소주를 챙겨준 동아일보 신황호 선배와 나의 모습. 말라가 해변에서 골뱅이 안주와 한잔 까고 있다. 아래사진은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신상협 기자(한국), 이진수 기자(중앙), 박미정기자(조선), 나, 권기해 기자(경향), 조주환 차장(중앙), 류지혜 기자(부산), 강희 차장(경인), 김윤곤 회장(조선), 신황호 차장(동아)......... 초상권 침해를 양해바랍니다.

알함브라 궁전에서 내려다본 집시의 알바이신 마을. 

 알함브라 궁전은 '붉다'라는 뜻을 지닌 궁전과 성곽의 복합단지이다. 스페인 남부의 그라나다 지역에서 머물던 아랍 군주의 저택이었던 곳으로 그라나다 시의 남동쪽 경계에 있다.
알함브라 궁전은 하루 8630명만 관람할 수 있다. 세계 최초의 시간제 입장이다. 네바다(눈이 내리다) 산맥 자락에 있다. 250년간 만들었는데 내부 인테리어가 예술이다. 천장세공, 치장벽화가 압권이다.

가우디의 작품 성가족 성당

 스페인이 낳은 세계적인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바르셀로나)는 카탈루냐의 레우스에서 태어났다. 그가 남긴 작품은 대부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바르셀로나에 있는 성가족 성당은 가우디의 천재성이 응축된 백미로 꼽힌다. 더구나 가우디가 죽을 때까지 미완으로 남아 더욱 유명해진 건물이다. 1884년에 착공된 건물은 가우디가 죽던 1926년 6월까지 교회 정면과 탑의 일부만이 건설되었으며, 127년째 공사중이다.

톨레도는 ‘바위산’이라는 뜻이다. 스페인의 옛 수도이자 전략적 요충지다. 인구 8만 명이지만 관광객은 350만 명에 이른다.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다. 칼을 만드는 주생산지이고 웨스트포인트 생도들의 칼도 모두 여기서 만든다. 스페인 육군사관학교도 여기에 있다.


아시아, 유럽을 넘어 3개국 2만 5000km 216시간에 걸친 대장정. 항공기만 6번, 카페리호 1회, 총동원 버스 6대. 가이드 6명이 총동원된 초특급 로드 버라이어티였다. 다닐 때는 힘들었는데 지금와서 생각하니 아름다운 꿈 한 편을 꾼듯하다.

긴급입수 사진들

Posted by 나재필

사진제공:한국편집기자협회. 김윤곤회장(앞줄 왼쪽 두번째), 그 옆이 인천일보 강희차장, 뒷줄 왼쪽 첫번째가 조선일보 박미정 기자. 그는 일과 재미를 아는 멋진 여자입니다.

 8일이 지난 사진입니다.
 이 사진 한 장을 갖기 위해 15년이 걸렸습니다. 15년의 세월은 눈물과 땀과 술과 모욕과 절망, 그리고 머리카락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이해와 사랑, 조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던 일입니다. 당일 시상 사진을 신문 지면에 싣는다기에 백방으로 뛰었지만 결국 8일이 지나고서야 입수했습니다.

 80일 만에 서울에 갔었습니다.
 서울역에 내리는 순간 옷깃을 여미게 만드는 바람이 코트 안을 비집고 애인처럼, 여자처럼 부벼댔습니다. 그 바람을 꼬옥 안고 숭례문 옆을 지나고, 뽀얀 얼굴의 여자들을 스쳐지나갔습니다. 달큼한 향기에 현기증이 났습니다. 서울은 정말 몇 달에 한 번씩은 '출장'을 가야 합니다. 느슨해진 몸가짐을 무장시키는데 이만한 훈련장도 없습니다. 저마다 바쁜 얼굴을 하고, 바쁜 보폭으로, 바쁜 일상에 뛰어드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 다시한번 넥타이를 고쳐매고, 구두끈을 조여매게 됩니다. 그들은 삶에 저항하고 투쟁하는 투사의 얼굴을 닮았습니다.

 8년의 서울생활이 지우개로 지워진 듯 새하얗습니다.
 태평로에서 술을 마셨는데 잠자리는 종로였습니다. 술에 떠내려간 것입니다. 아침에 휑뎅그렁한 얼굴로 일어나보니 3평 남짓한 여관이었습니다. 황당했습니다. 행여 이름모를 여자가 내 팔짱을 끼고 누워있는 것은 아닐까 두리번거렸습니다.(물론 전날 호프집에서 술을 마셨기 때문에 그런 일은 절대 안 생김) 
 어젯밤 기억의 소자는 어디로 갔는지 머리속이 새하얗게 비어져 있었습니다. 
종로구청 옆 '봄'이라는 호프집에서 잃어버린 핸드펀을 찾고 지우와 함께 대낮부터 소주를 다시 한 잔 걸쳤습니다. 안주는 부침개 모듬이었는데 제법이더군요. 암튼 '기억상실'의 1박2일은 그렇게 술 속에 떠내려갔습니다. (강호동) 1박~2일~~
Posted by 나재필
TAG 사랑, , 편집

 


"알바트로스가 얼마나 힘들게 비행을 하는지 아니? 바람이 불지 않으면 날수 없는 새.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날자...살자...."
(2005년 1월 12일 23시32분....한인섭 국장)


한인섭 국장이 나의 싸이월드 방에 들어와 남긴 말이다.
2005년 1월 굿데이신문은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퇴로에 섰다.
난 힘들었고 하루빨리 날개를 접고 떠나고 싶었다. 그러나 회생의 길을 찾아 동분서주하던 한인섭 당시 굿데이신문사장은 끝까지 힘내자며 동행을 요청했다.
그가 누구인가. 춘천 태생으로 강원일보와 매일경제신문, 국민일보와 경향신문에서 지천명(知天命)이 넘도록 편집쟁이로 산 사람 아닌가. 경향신문 매거진X를 만들었고 굿데이신문이 월드컵편집상을 휩쓸게 한 사람 아닌가.
(현재 한국언론재단 교수)

스스로 목수라고 자칭할 정도로 손재주가 남다른 사람. 인자한 얼굴과는 달리 편집만큼은 카리스마가 철철 넘치던 사람. 사람을 좋아해 후배와도 이른 새벽까지 술자리를 내달릴 줄 알던 주성(酒聖). 그는 '편집의 거성' 함빠꾸(함정훈 국장)의 수제자이기도 하다. 후배들이 제목과 레이아웃을 달아오면 여지없이 '빠꾸'를 시킨다고 해 붙은 함빠꾸 선생의 애제자였던 것. 그는 편집의 달인이었다. 그는 헤드라인 공장장이었고 사진 에디터였으며, 디자이너였다. 제목을 다는 기술과, 사진을 보는 안목과, 신문을 만드는 방법을 꿰고 있었다. 신문을 만들 때면 무서우리만큼 천착했고, 일등을 향한 끝없는 도전정신을 보여주었다. 그러한 노력은 2002 월드컵에서 빛나는 저력으로 나타났고 후배들로하여금 편집을 사랑하게 만들었다. 광화문 광장으로 뛰어나가 호외를 뿌리던 편집기자들을 행복하게 했다.

언젠가 퇴사를 결심한 나를 찾아온 적이 있다.
영화처럼 비가 내렸다. 눈물처럼 비가 내렸다.
후배 몇몇이서 선술집에 모여 들었고 우리는 빗소리에 울음을 감추고 소나기처럼 마셔댔다. 그는 나의 통장 잔고를 걱정했고 나의 아내와 자식을 걱정했다. 그는 편집의 대선배였고, 회사의 CEO였지만 뜨거운 눈물로 가족애를 보여주었다.
나는 다시 그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는 회사에 간이 목제침대를 만들어놓고 기거하면서 일을 했다. 그는 내 인생에서 알바트로스의 희망을 안겨준 사람이다.

...........................
2008년 12월5일 서울의 한 PC방....
9월 29일에 썼던 이 글을 보고 난 다시 눈물을 흘린다.
어제 한국편집상 시상식장에서 많은 선후배들을 만났다.
마치 '오늘'처럼 지나간 '어제'가 다시 생생하게 돋아났다.
그리고 또 또 또 생각했다. 한인섭 국장을...
세상은 왜 곧은 길을 투벅투벅 걸어가는 사람을 외면하는가.
잘 살아야 하는 사람에게, 잘 살아도 될 사람에게 시련을 안겨주나.
그분에게 알바트로스의 날개를 달아주고 싶은데 나에겐 제우스의 손이 없다.
그러나 희망은 있지 않은가. 깃털처럼 하나 하나 몸속에서 웅비의 날들이 자라고 있지 않은가. 그 날을 위해 선배여, 대선배여 파이팅!

<알바트로스.....>

알바트로스는 봉황이나 불사조 같은 새와는 달리 실재하는 새. 어떤 독수리, 어떤 갈매기보다도 멀리 그리고 높게 나는 새이다. 알바트로스는 알에서 깨자마자 바닷물에 떠다닌다. 당연히 비행법을 채 익히지 못한 알바트로스의 새끼들은 흉포한 표범상어들의 표적이 된다. 그러므로 알바트로스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상어의 이빨에서 벗어나려고 필사의 날갯짓을 하게 된다.

대부분은 파도 위에서 퍼덕이다가 비행에 성공하지 못하고 상어의 먹이로 짧은 생을 마치게 되지만 구사일생으로 날갯짓에 성공을 하여 하늘로 떠오르는 녀석들이 있다. 이 최초의, 죽음의 비행에 성공한 알바트로스의 새끼들만이 강한 날개와 그 날쌘 비행술을 타고난 천재들만이 비로소 왕양한 하늘과 바다의 자유를 허락받게 되는 것이다.

생명과 함께 치열한 비행의 모험을 동시에 타고난 이 알바트로스들의 드라마는 조나단의 그 미지근한 <갈매기의 꿈>과 비길 것이 못된다. 그렇기 때문에 보들레르가 시인의 운명을 발견했던 것은 갈매기가 아니라 알바트로스였다.(이어령의 '말속의 말')


 

나는 날고 싶어졌다.
어릴 적 꿈에 자주 날았던 그 창공을 다시 기억해냈다. 부러졌던 마음속의 날개를 다시 찾았다. 날개는 퇴화한 것이 아니라 진작부터 날개가 없었던 것이다.
...........

Albatros

골퍼들의 꿈은 홀인원이지만 그것보다도 더한 것이 알바트로스. 600m 가량의 필드에서 단 두 번만에(규정타는 다섯 번) 맥주 컵만한 홀 안으로 공을 집어 넣어야 비로소 알바트로스가 된다.(골프는 양떼를 몰고 다니는 목동들의 놀이에서 유래된 것이라나...목동의 지팡이가 골프채가 되고 돌이 골프공으로 변하고 토끼굴과 같은 것이 홀컵이 된 셈). 한 개를 적게 치면 버디(birdy)가 되고 두 개를 더 적게 치면 이글(eagle)이 된다. 그리고 마지막 한계라고 할 수 있는 세 개를 더 적게 치면 드디어 그 알바트로스라는 것이 등장하게 된다.

Posted by 나재필

쟁이

편집 2008.09.17 13:34

黑과 白, 깨알같이 박힌 마음의 행간.

텍스트는 도망가지 못하는 생각의 박제라네.

터럭 빠진 여백의 이랑에 흐르는 흑백의 발자국.

분단시대 지병 앓듯 지면은 고독한 유배지.

화톳불처럼 튀는 희로애락 담고

톡톡 튀는 사람들 천의 얼굴 싣고

때로는 치다꺼리, 때로는 푸닥거리

열 손가락 자수에 담아야 하는 고독한 수학자.

마치 외로움의 봇짐을 풀어놓듯

미완의 여백에 써내려 가는 외경의 작업일지.

재단사처럼 자르고 붙이고

작명소처럼 짓고 따지고

족집게처럼 뽑고 갸름하고

설계사처럼 나누고 쪼개고

헤드라인 공작실은 불온한 응급실.

허구한 날 앉아서 생인손 앓도록 마름질하고

그러다가 생각의 굳은살들이 찢겨

시장통 생선같이 널브러지면 그것이 데드라인.

오이디푸스도, 엘렉트라도 막지 못하는 고집스러운 콤플렉스.

그래도,

거마비 받고 악기 부는 악사는 아냐.

꺼지는 한이 있어도 드러눕지 않는 불꽃처럼

외설스럽더라도 발정하지 않은 만다라처럼

때로는 비뚜름해도, 때로는 고루해도

옹이 같은 아픔을 지우듯 딸깍발이 생은 간다.

그렇다고 덧칠하지 마. 그렇다고 자기네 생까지 편집하진 마.

잡티 묻은 채로 그냥 사는 거야.

쑥부쟁이 꽃대같이.

호화판 모꼬지는 없어도 비럭질하는 떨거지는 안 되게.

도돌이표 아침 해가 오늘도 하염없이 밝았으니.


☞“신문은 편집이다.” 편집기자 15년 동안 1000번은 들었다. 그 1000번의 되새김은 ‘존심’이었다. 외골수 같은, 스스로를 외통수에 놓는 느낌이었지만 그 외고집, 편집증(paranoid)적인 편집이 좋았다. 편집자는 연기와 불꽃이다. 서명이 남지 않는다. 한번 손을 대고 그 손을 놓는 순간 끝이다. 편집 대선배 한인섭 국장이 강조하던 긴장과 이완의 연속이다. 수많은 기사와 수많은 사건을 대하면서 인생을 배우고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그러나 편집을 하면서 1000명의 사람을 만난 것을 더 행복하게 생각한다. 그 1000명은 편집기자로 1만여 판을 짜면서 사귄 자산이다.  그 중 서로의 팬으로써 지지하고 아껴주는 사람은 50여 명. 산에서, 직장에서, 술집에서, 운동장에서 우정을 나눈 참벗이다. 옷깃만 스쳐도 다쇼(多生), 전생의 인연이다. 그러나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보다 사람으로 사는 것이 더 어렵다. 더구나 사람답게 사는 것이 더 어렵다. 뜻이 맞지 않는 사람을 피해가기가 먼저 어려운 일이고, 그 사람과 악연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기가 또 어려우며 결국 잘못된 인연으로 후회하지 않기가 제일 어렵다. 그들은 후회하지 않게 만든다. ‘현재까지는’이라는 전제가 필요치 않다. 내가 아프고 힘들고 ‘술이 필요할 만큼’ 외로울 때 그들은 달려와 술이 되고 말이 되고 어깨동무가 된다. 세상 돌아가는 흐름 속에서 그 흐름을 꿰뚫는 방법을 배웠으며 읽는 자와의 호흡을 또한 배웠다. 편집을 사랑하기 시작하면서, 편집에 대해 열병을 앓게 되면서 매일 매일이 두근두근거렸다. 지적 호기심이 일었다. 그 호기심은 영혼의 비타민 같은 거였다. 하루하루를 여백에 채우고 그 여백에 장식과 장치와 눈물과 감동을 버무렸다. 아침 식탁위에서 읽는 이로 하여금 하루를 여는 비타민이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신문사 편집국은 활어회 시장 같은 곳이다. 생선처럼 펄떡펄떡 뛴다. 싱싱하다. 그 싱싱함은 정신에서 오는 거라고 단언한다. 1면서부터 마지막 면에 이르기까지 숱한 정신이 ‘+ -’ 전극의 충돌로 살아난다. 그 생선은 팔딱거리면서, 독자를 향해 내달린다. 그 전쟁터에서 살다보니, 그 우정은 전우애와 닮아서 더욱 진하고 아름답다. 잉크냄새 폴폴 풍기며 윤전기가 돌아가면 그 뒤는 술이다. 회포다. 그리고 다음 날도, 그 다음 다음 날도 똑같은 수명을 소진한다. 뛰며 펄떡이며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살아간다. 그 전우들이 함께 한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Posted by 나재필



세월은 흘러가더라

그렇게 흘러가더라

종이만큼의 질량으로 버텨온 펜의 노래.

공백을 메우는 것이 여백임을 알았을 때

바람처럼, 뜬구름처럼 살아온 지난 날이 미워

저당 잡힌 밤을 안주삼아

만원어치의 울홧술을 마시고 천원어치의 비애를 배설했다.

그 젊은 날의 객기(編輯症)로 얻은 것은

24개의 주름과 10kg의 살과

9490개의 술병과 플라시보 같은 중병.

30만 5005개의 탈모, 0번의 연애이력, 780번의 야근,

427050장의 종이(gera), 16235장의 신문 쪼가리였다.

지독한 출산을 위한 표독한 합궁.

그렇게 봄여름가을겨울은 가더라.

그렇게 겨울가을여름봄은 오더라.



여백위에 핀 꽃은 저승꽃이 되었다가도

가끔은 행간 속에서 웃음꽃으로 피고 졌다.

가로 39.4cm 세로 54.5cm, 가로 7단에 세로 15단.

미추한 헤드라인은 데드라인을 거치며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경쟁 속에 미아처럼 버려졌다.

규격화된 방안(지면)에서 배식(밸류 측정)을 하고

요리(레이아웃)을 하고

메뉴판(제목)을 거는 지루하고도 달콤한 옥살이.

그게 바로 (편집쟁이의 체온) 36.5도로 만든 365일의 일상이었다.



세상은 보기보다 참혹하더라.

지면은 생각보다 참혹하더라.

울화통 나는 세상에서 울화병을 얻었고

천식 나는 지면에서 고뿔을 앓았다.

나라는 이름으로, 羅라는 이름으로

너의 이야기를, 너의 언어를 읊조리며

7번의 이직과 2번의 폐간을 당했다.

그렇게 윤회한 삶은 슬프지 않았다.

그렇게 변덕스러운 삶은 아프지 않았다.

業으로 하지 않고 樂으로 일했으니 하늘이 도왔다.



첫새벽은 아침을 깨우고 아침은 낮을 향해 질주한다.

나도 질주한다. 한낮의 허허벌판 지면속으로 질주한다.

걷고 또 걷고 청춘의 고개를 넘어 중년의 비포장도로로 달려간다.

가끔은 눈물로, 가끔은 빗물에 눈물을 감추며 달린다.

내 심장의 박동을 요동치게 하는 편집.

그 정교하고도 무서운 삶의 감옥.

하루에도 수십 번 알카트라즈의 탈옥을 꿈꾸지만

한번도 쇠창살 너머 햇살을 만져보지도, 훔쳐보지도 못한

그 감옥.

밤바다 굿바이를 외치면서도 새벽에 맨발로 뛰어나가 배달신문을 보는

밤마다 탈옥을 외치면서도 아침엔 굿모닝을 외치는 미련한 에디터.



저 창살 너머 펄럭이는 햇살의 마력을 난 안다.

저 햇살 너머 숨어있는 희망의 창살을 난 믿는다.

나의 사랑스러운 감옥

나의 곤혹스러운 감옥,

아, 찬란한 슬픔의 수인(囚人)이여!

지금은 몰라도, 아직은 몰라도

나중에, 백발이 성성한 나이가 되었을 때

그 작은 감옥이, 큰 행복이었노라고 말하고 싶다.

정녕 후회없는 행복한 감옥이었노라고 말하고 싶다.

<편집기자협회보 게재>

Posted by 나재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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