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엔 자전거가 네 대 있다. 비오면 비를 맞고 눈이 오면 눈을 맞더니 이제는 '삭신'에 녹이 슬어 고물이 됐다. 한때 20㎞의 속도로 두 발의 안위를 살펴준 고마운 이동수단이었는데 퇴물이 된 것이다. 거치대가 없는 아파트에 네 대를 놓자니 관리도 어렵고 탈일도 없어 처분키로 했다. 자전거포에서는 거저 주면 모를까 값을 쳐줄 수는 없단다. 어쩔 수 없이 고물상을 찾아갔는데 그 흥정이 고깝다. 자전거 상태도 묻지 않고 대당 3000원을 주겠다고 했다. 쓸 만한 한 대를 빼고 세 대를 팔 심산이었으니 (3000원 x 3=9000원) 자전거 세대 값이 고작 9000원이었다. 에계계~. 엿하고 바꿔먹어도 그 정도 값어치는 넘을 듯싶었다. 결국 흥정을 깼다. 며칠 후 3개월간 구독했던 신문지(파지)를 들고 고물상에 갔다. 근수(斤數)를 재더니 9000원을 주었다. 자전거 세대 값과 신문 3개월 치가 똑같았다. 오 마이 갓~.


▶고물상에 동행했던 아내가 고물 판값으로 수제비를 먹자고 했다. 나는 일언지하에 거부했다. 자전거 세대 값으로, 신문 파지 3개월 치 돈으로 수제비를 먹을 수는 없었다. 대신 집에서 520원짜리 안성탕면을 끓여주었다. 속으론 무척 미안했다. 아니 미안했다기보다는 쪽팔렸고 아렸다. 하지만 어쩌리. 고물을 팔아 얻은 9000원이 그렇게 커 보이는 걸. 예전 학창시절에도 공병(빈병)을 팔아 푼돈을 마련한 적이 있다. 수십 개의 공병을 모아봤자 2000원 안팎이었지만 그 '고물'은 한 끼의 라면도 되고, 열 구간의 차비도 됐다. 이처럼 '고물'은 낡거나 헌 물건을 말하지만 때론 '보물'도 된다. 고철이나 극젱이, 고장 난 밥솥, 유행 지난 헌 옷, 구식 라디오…. 물건 값도 천차만별이어서 단돈 몇 백 원짜리부터 몇 십만 원짜리까지 있다. 값의 흥정은 따로 있지 않다. 눈금이 거의 보이지 않는 낡은 저울과 주인의 눈대중이 전부다. 그러니 손에 쥐는 것은 '어림잡아' 몇 푼이다.

▶고물상이라는 이름에는 외환위기로 인한 대량 실직 등 국가가 감당하지 못한 복지의 중층적 모순들이 오롯하게 투영돼 있다. 버려진 도시빈민, 버림받은 농촌 실업자가 넝마주이를 시발로 우리나라 재활용산업의 문을 열었다. 고물은 버려지는 것들에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창조물이다. 절제와 검약의 반듯한 정신이기도 하다. 간식으로 머루랑 다래랑 먹을 수는 있겠으나, 그것으로 주식을 삼자면 배가 고파 살수 없다. 부자에게 고물은 퇴박맞은 물건이지만 빈자(貧者)에게는 검박한 보물이다.

▶국감이 진행 중이다. 지금 국회에 계류 중인 미료(未了) 안건은 6000건이 넘는다. 18대 국회에서 발의된 안건은 1만2312건으로 역대 최다이며 17대 국회의 두 배에 가깝다. 그러나 이 중 가결된 안건은 15%에 불과하다. 대다수가 공중에 뜬 상태다. 의원 개개인의 입법 구상을 혼잣말 주절대듯 쏟아놓은 안건이 '고물'처럼 쌓여 있는 것이다. 고물은 쓸모없을 때 버려진다. 국회가 본연의 구실을 잊고 365일 딴눈을 판다면 고물과 무엇이 다르리. 단풍의 미덕을 생각해보라. 단풍은 제 몸을 바람에 태워 고적한 즐거움을 안긴다. 내년에 더 나은 빛깔을 보여주기 위해 단풍은 스스로 잎을 떨어뜨려 퇴비가 된다. 처절하리만큼 아름다운 자기희생이다. 우리가 고물을 업신여기지 말아야 할 이유는 '배고파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배부르게' 하기 때문이다.


Posted by 나재필

파란색은 큰아들, 빨간색은 작은 아들 자전거. 대당 14만원쯤 한다. 왼쪽 파란색 자전거로 대전~송탄까지 간 적이 있다. 내 다리를 대신해 애써준 고마운 자전거다. 말처럼 묶여있는데 어쩔수 없다. 파란색 자전거는 한번 잃어버렸다가 되찾았다. 안장까지 빼가는 세상이니 모두들 도둑놈 조심~

 아버지가 불혹을 맞았을 때 내 나이 12살이었다. 불혹이던 아버지는 칠순을 이미 넘겼고 내 나이도 마흔 두 개다. 화가 나시면 두 눈에 파란 불꽃이 튀시던, 그 강골의 아버지가 이제는 약골이 되셨다. 너무나 무서워 반항할 수도 없었던 학창시절. 밭고랑으로, 야산으로 줄행랑치던 아들이었기에 그 속절없는 꺾임에 더 눈물이 난다. 십 오리 길을 자전거를 타고 다녀야 했던 우리 집엔 자전거가 세대였다. 나와 형, 아버지의 자전거. 그야말로 ‘잔차맨(자전차맨)’ 가족이었다. 아버지는 체인이 엉키거나, 빵꾸가 나거나, 고장이 났을 때 기술자처럼 고쳤다. 구리스(grease, 윤활유)를 바르고 브레끼(브레이크)를 단단히 조이는가하면 뒷바퀴에 있는 복잡한 다마(구슬) 조합까지도 거뜬히 해냈다. 때문에 자전거포 갈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지금 내게도 자전거 세 대가 있다. 두 명의 아들에게 각각 1대씩 배속하고 나머지 한 대는 심심풀이용으로 내가 타고 있다. 이제는 아버지가 해왔던 것처럼 아들의 자전거를 내가 고치고 있다.(그러나 아버지처럼 고치지는 못한다). 별로 말이 없었던 나에게 말 좀 하라고 다그치던 아버지처럼 이제 나도 아이들에게 대화를 독촉하고 있다. 편식을 탓하던 아버지처럼 나도 아들의 편식을 나무라고 있다. 커서는 아버지처럼 잔소리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나도 아버지처럼 닮아가고 있다. 이제 아버지의 얼굴에도 세월의 깊디깊은 ‘밭고랑’이 생겼고, 앙상한 뼈마디엔 찬바람이 몰아친다. 창백한 햇살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 참으로 가슴아픈 '훈장'이다.

원래 임자는 와이프것이었다. 열심히 타고다니더니 궁뎅이가 아프다고 포기한 자전거다. 요즘은 내것이 됐다. 아파트밖에 세워놓았더니 녹이 슬어 기어등을 고쳤다. 그래서 아파트 계단으로 모셔왔다. 그런데 뭔가 외로워보인다.

 하드 파는 짐발이 아저씨가 나타나면 그의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며 달짝지근한 하드 국물이라도 얻어먹고 싶었던 추억과, 학창시절 계집애를 뒷좌석에 태우고 가던 추억이 봄바람처럼 기억소자를 끌어내는 자전거. 아파트 계단에 말처럼 묶여있는 자전거를 보노라니 주전부리 같은 추억들이 떠오른다. ‘인생은 자전거 타기와 같아서 계속 페달을 밟고 있으면 넘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넘어지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가.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울 때, 떨어지고 다시 올라타고, 또 떨어지고 다시 올라타고…. 그런 과정을 되풀이 해 자전거를 배우듯 힘들고 어려운 요즘, 다함께 페달 밟는 심정으로 꿋꿋하게 맞바람을 견뎌보자.

“가장 큰 실수는 실수하기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Posted by 나재필


 소설 '칼의 노래' 저자인 김훈은 자전거 마니아다. 그는 16년간 한국일보 기자생활을 했고, 이후로도 언론계에서 줄곧 일했다. '자전거여행' '칼의 노래' '남한산성'이 빅히트 하면서 작가로서의 명성도 탄탄하다. 그는 1999년 가을부터 2000년 여름까지 '풍륜(風輪)'이라는 이름의 자전거를 타고 우리나라 곳곳을 순례했고 최근엔 프랑스 파리, 독일 베를린, 체코 프라하를 자전거로 누볐다. 그의 자전거는 4000만 원대로 알려져있다.

 봉급쟁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것이 있다. 바로 ‘넥타이’를 풀고 ‘생활의 전선’에서 훌쩍 떠나는 것이다. 식솔이 없다면 당장이라도 쇠방울이 달려있는 목줄을 끊고 꿈을 향해 질주하고 싶은 것이다. 세상에 그런 용기를 지닌 사람들은 많다.
 
영국 아줌마 앤 머스토 우연히 인도에 갔다가 자전거를 타고 사막을 가로지르는 한 여행자의 모습에 충격을 받고 자전거 세계일주를 감행했다. 그녀는 '아줌마' 딱지를 떼고 영국을 출발해서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 터키, 파키스탄, 인도, 타이,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미국을 거쳐 다시 영국으로 돌아오기까지 열다섯 달 만에 1만 2000마일에 걸친 대장정을 해냈다. 이 여인은 최초의 자전거 세계여행 기록자로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쟈니 김(김영석)은 20년간 자전거 무전여행을 한 사람이다. 스물아홉 살에 떠난 여행은 쉰 살을 바라보는 나이에 반환점을 돌았다. 1989년 8월 부모님께 ‘유럽 여행을 몇 달 다녀오겠노라’고 둘러대고, 유럽행 편도 비행기 삯과 자전거 한 대를 가지고 떠난 여행이 자그마치 20년이 걸린 것이다. 그는 가장 긴 세월동안 집에 안 가고 여행을 한 부문의 기네스 세계기록 비공식 보유자다. 옳거니, 그렇다. 한번 사는 인생 ‘다리 힘이 더 빠지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세계를 두 바퀴로 달리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언젠간~꼬옥~~

 피둥피둥 살 찌는 소리가 들리는 요즘 '두 바퀴의 유혹'이 더욱 강렬하다. 자전거 페달은 통학용으로 10여 년 넘게 내 발을 대신했고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간간이 나의 역마살을 부채질했다. 전국의 심산유곡을 여행하며 살까지 뺄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을까. 언젠가는 폼 나는 자전거 한 대 장만해서 한반도의 들녘을 질주하고 싶다. 지난해 7월 난 자전거로 '무모한 도전'을 감행했다. 대전서 서울까지 자전거를 타기로 한 것이다. 아침 7시 아침밥을 간단히 먹고 집을 나섰다. 헬멧이나 고글도 착용하지 않았고 통풍이 잘되는 기능성의류도 입지 않았다. 엉덩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쿠션 패드 달린 스판덱스 쫄바지도 입지 않았다. 초딩 아들의 아동용 자전거가 '라이더'로서의 준비물 전부였다.


 집에서 유성까지는 30여 분이 걸렸는데 엉덩이가 벌써 아파왔다. 집으로 '위화도회군'을 할까 생각했지만 '잘있어. 자전거타고 서울갔다올게'라며 호기있게 안녕을 고한 아침인사가 생각나 멈출 수가 없었다. 유성서 행정도시 예정지로 가는 길은 비교적 넓은 4차선이었다. 그러나 자전거도로는 없었다. 70cm 정도되는 인도가 있을 뿐이고 시속 100km가 넘는 차들이 씽씽 달릴 뿐이었다. 
 유성서 행정도시까지는 약 2시간이 걸렸다. 차를 피하면서 아슬아슬하게 가는 거라 시간이 더뎠고 전문 사이클이 아닌 아동용 자전거라 속도도 안났다. 얼마나 힘들던지 주변 경치는 구경조차 못했다. 행정도시서 조치원까지도 1시간, 조치원서 천안까지는 1시간 30분이 걸렸다.
 시장기가 돌았다. 천원 김밥 두 줄을 사고 구멍가게에 들러 뿌셔뿌셔 하나를 샀다. 왜 그 상황에 뿌셔뿌셔가 먹고싶었는지는 아직도 그 이유를 모른다. 천안 북일고가 올려다보이는 논두렁에 앉아 뿌셔뿌셔를 먹는데 한심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출발. 천안서 성환 쪽으로 가는데 펑크가 났다. 자전거에서 내려 수리점을 찾아 1시간 30분 넘게 헤맸다. 성환읍내서 만 원을 주고 새 튜브로 갈았다. 튜브에 칼날 파편이 박혀있었다. 성환에서 평택까지 2시간, 다시 송탄까지 1시간을 달렸다. 중요 부분이 속옷과 마찰을 일으켜 피부 트러블이 생겼다. 페달을 밟을 때마다 묘한 아픔이 허벅지 사이서 전율했다.
 이제 더이상 두 바퀴를 움직일 수가 없었다. 길가에 있는 대신정기화물에 들러 자전거를 택배로 부쳤다. 거기까지가 무모하게 도전했던 자전거 여행기의 끝이다. 8시간 만에 막을 내린 서울 원정기는 못내 아쉬웠지만 얻은 건 있었다. 자전거여행에 대한 자신감. 언제라도 기회가 온다면 자전거를 타고 전국일주를 하리라는 자신감이 생긴 것이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생활의 먼지'를 훅훅 털어버리고 세상 밖으로 떠나는 날이 언제쯤 오려나!


 #심폐기능 향상에 최고 
 자전거 운동을 지속적으로 하면 심장과 폐기능이 발달된다. 정상인의 평상시 심박수가 1분에 70회 정도인 데 비해 마라톤 선수와 같이 지구력이 뛰어난 사람은 60회 정도에 불과하다. 심박수가 적을수록 심장기능은 우수하다. 자전거를 타면 폐 탄력성이 증가해 공기를 최대로 마시고 내쉴 수 있는 능력이 커진다. 기도가 확장돼 기도를 통한 공기의 이동속도도 향상된다. 
 
#하체발달, 비만치료
 자전거 운동은 근력, 특히 하체근력을 발달시킨다. 페달을 돌리는 하체근육이 반복적으로 수축·이완되기 때문에 근을 구성하는 단백질이 증가해 굵기가 굵어진다. 근육이 굵어지면 글리코겐 등 많은 에너지원을 저장할 수 있는 능력이 커지게 된다. 자전거 타기는 비만치료를 위한 운동으로도 제격이다. 비만환자는 운동 때 50% 수준의 강도로 l시간 정도 운동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전거 운동은 달리기, 걷기 운동에 비하여 비교적 적은 부분의 근육을 이용하므로 달리기 때보다 2배 이상 하는 것이 좋다.

 
이반 일리히는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를 통해 “자전거는 인간의 신진대사 에너지를 이동력의 한도에 정확하게 맞춘 균형 잡힌 이상적인 변환기”라고 규정했다. 모리스 르블랑의 소설 '이것이 날개다'에는 두 여인이 블라우스를 벗어젖히고 젖가슴을 드러낸 채 자전거를 타는 장면이 나온다. 자전거를 탈 때만큼은 무한한 해방감을 느끼고 싶었던 게다. 가슴을 활짝 편 그녀들의 '자탄풍'이 파인더에 아른거린다.

Posted by 나재필

아버지

忙中日記 2008.09.11 14:17
 아버지, 지팡이가 되셨다. 꼬부랑이 되셨다. 얼굴엔 세월의 깊디깊은 밭고랑이 생겼고, 앙상한 뼈마디엔 찬바람이 몰아친다. 창백한 햇살이다. 얼마 전에는 당뇨까지 생겨 잔혹한 하루하루와 싸우고 있다. 화가 나시면 두 눈에 불꽃이 튀시던, 그 강골의 아버지가 약골이 됐다. 너무나 무서워 반항할 수도 없었던 학창시절. 밭고랑으로, 야산으로 줄행랑치던 아들이었기에 그 속절없는 꺾임에 더 눈물이 난다. 십 오리 길을 자전거를 타고 다녀야 했기에 우리 집엔 자전거가 세대였다. 나와 형, 아버지는 시쳇말로 ‘잔차맨(자전차맨)’이었다. 아버지는 자전거 체인이 엉키거나, 펑크가 나거나, 고장이 났을 때 기술자처럼, 아니 귀신처럼 고쳤다. 10여 년을 통학하면서 자전거포에 간 기억이 없다.

 
지금 내게도 자전거 두 대가 있다. 그 자전거를 이제 내가 고치고 있다. 그 독한 아버지 대신 내가 두 아들의 체인을 고치고 있다. 말수가 적었던 나에게 입에 곰팡이 나겠다고 다그치시던 아버지처럼 내가 아이들에게 대화를 독촉하고 있다. 편식을 탓하던 아버지처럼 나도 아들의 편식을 나무라고 있다. 커서는 아버지처럼 잔소리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나도 아버지를 닮아가고 있다. 무서운 피다.


 지금 창밖엔 적갈색의 단풍이 겨울 길목서 가볍게 몸서리치고 있다. 저 단풍을 보며 아버지를 떠올린다. 저 낙엽을 보며 인생을 생각한다.
단풍은 나무와 잎이 이별하는 것이다. 곧 사라질 것들이 남기고 가는 마지막 선물이다. 모든 걸 떠나보내고 쓸쓸해진다. 하루 25km 남하하는 단풍. 그 단풍처럼 색 바랜 아버지, 낙엽처럼 쓸쓸한 노년의 아버지, 저 빛바랜 낙엽처럼 노쇠한 아버지를 보며 난 뒤돌아 운다. 어쩌면 그렇게도 마른 낙엽을 닮았는지. 너무나 강해 쓰러지지 않을 것 같은 아버지의 쓰러짐을 보며 아무도 모르게, 들키지 않도록 속절없이 운다. 내 눈물을 아들은 모를 것이다. 그러나 내 나이가 되면 아들도 나의 눈물을 이해하게 될 것이고 그도 울 것이다.


 고등학교 때 젊은 객기로 돈도 없이 술을 진탕 먹고 아버지께 술값을 받으러 간 적이 있었다. 그때 아버지는 아무 말도, 아무 제재도 없이 선뜻 술값을 내 주셨다. 학생이 무슨 술이냐고, 그것도 공술을 먹고 다니느냐고 몽둥이 찜질을 해도 시원찮을 판에 아버지는 장롱서 꼬깃꼬깃한 돈을 내주셨다. 오히려 그 묵언이, 무폭력이 질풍노도의 소년에게는 더 무서운 가르침이었다.


어느새 나도 아버지의 불혹을 맞았다. 또래의 어린 손자를 잃어버린 할아버지가 부모들도 포기한 어린 핏줄을 찾기 위해 엿장수가 되었다는 얘기가 이제는 아프게 박힌다. 그 엿가락 소리는 할아버지의 절규다. 나보다 29번의 겨울과 29번의 봄을 더 보낸 아버지. 시지푸스의 노동처럼 그 끝없는 세월을 노동으로 산 아버지. 남들 아버지처럼 달마다
누런 월급봉투를 가지고 나타난 적이 없는 블루칼라였지만 자식을 화이트칼라로 만들기 위해 헌신한 아버지, 고맙습니다. 오래오래 사소서.

Posted by 나재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