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

잡동사니 2010.12.21 15:23

▶"내가 그 기집애와 동거를 시작한 방은 우물보다 낮은 방이었다." 최인호 중편소설 '두레박을 올려라'는 가출한 남자 대학생이 소매치기 여자와 지하 단칸방서 동거하는 얘기다. 사랑을 갖고 놀던 탕아(蕩兒)는 결국 집으로 돌아간다. 셰익스피어는 8살 연상의 아내를 그다지 사랑하지 않았다. 그는 유언장에서 친구와 이웃에게는 온정을 베풀면서도 '집사람에겐 두 번째로 좋은 침대만 주라'고 했다. 가야금 명인 황병기의 아내이자 소설가인 한말숙은 가상 유언장에서 '남편의 재혼은 안 된다'고 못 박았다. 수필가 육상구는 '세상에 두 번 태어나서 행복하게 살다가 떠나오. 어머님으로부터 태어나 반평생을 살고, 당신을 만나 반평생 동안 복락을 누렸소'라고 읊었고, 시인 정호승은 '미안하다.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이처럼 사랑의 종류는 하나이나, 표현방법은 수만 가지가 넘는다.

▶젊은 시절 상투적인 호기를 부리던 때가 있었다. 이십대에 '블루'라는 애칭의 중고자동차를 샀다. 어느 날 이 차를 몰고 무작정 동해를 향해 액셀을 밟았다. 댓바람에 달린 시속 80㎞는 청춘의 속도였다. 첫사랑 여자는 행방도 모르고 동행했다. 한적한 바닷가, 모딜리아니의 그림을 닮은 길쭉하고 신비한 그녀와 소주를 불고 밤바다를 유희했다. 그녀는 온전히 마음을 열지 않았지만 그 때 보았던 그 별빛만큼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첫사랑은 덧없이 사라지는 ‘찰나’다. 마치 낙인처럼 가슴속에 담아두려는 첫사랑은 실은 잊어야 할 목록이다. 배우자와 애인 몰래 추억을 보관하는 '첫사랑 표본실'이야말로 위험한 기억인자로 남아 훗날 사랑을 잡고, 사람을 잡는다. 긴 세월 동안 숱한 필부필부(匹夫匹婦)들 가슴에 불을 댕기는 첫사랑이지만 지금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면 깨끗이 지워야한다.

▶연애시절, 지갑을 잃어버려 ‘병팔이’가 된 적이 있었다. 지금의 아내와 사귀고 있었을 때인데 자취방을 쥐 잡듯이 뒤져봐도 동전하나 없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빈병을 팔아 소주 한 병과 라면을 샀다. 우린 팅팅 불어터진 라면을 먹으며 겉으론 웃고 속으론 울었다. 이후 월세 5만 원짜리 단칸방에서 시작한 예비 결혼생활은 행복했다. 헛기침 소리로 사용 유무를 알리는 뒷간, 푸성귀를 길러 먹을 수 있는 텃밭이 있었다. 영화관에 가는 대신 홈비디오를 보고, 커피숍 대신 커피믹스를 먹는 2인분의 삶, 포플린 이불 위에서 쪽잠을 자더라도 좋았다. 빤히 들여다보이는 가난, 슬픔이 가득했는데도 좋았다. 하루에 한 번 샤워해야 하는 여자의 자존심을 채워주지 못한 것을 빼고는.

▶인생 마라톤 42.195㎞에서 다시 오르막을 가고 있다. 정확히 보면 체력이 빠지는 25㎞ 지점인 듯하다. 속도가 떨어져 내내 가쁜 숨을 내뱉는다. 이 무거운 삶의 레이스에서 가족(핏줄)이 없었다면 어찌됐을까. 언제부터인가 내천(川)자로 자고 있는 아내와 아이들을 보면 괜스레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 해준 것이 없고, 해줄 것이 없어서가 아니다. ‘인연’을 맺어 ‘연인’이 되었고 ‘장가’를 가서 ‘가장’이 되었지만 좀 더 멋지지 못해서다. 고작 새벽녘 이불을 걷어차고 자는 식솔의 배를 덮어주는 일종의 면책행위를 할 뿐이다. 다행인 것은 아직까진 ‘아빠, 나빠'라는 말을 듣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글자를 떼어내 조합하면 ‘살아가는’ 것이 된다. ‘인생 42.195㎞’는 혼자 뛸 수 있지만, 함께 뛰는 사람이 있다면 조금은 가벼워질 수 있다. 지금 옆자리를 확인해보라. 누가 함께 뛰고 있는지.

Posted by 나재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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