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음(賣音)

분류없음 2012.05.02 15:07

 

▶기녀(妓女)라는 명칭은 고려 때 중국에서 직수입됐다. 기생은 원래 궁중의 약(藥) 제조나 가무를 맡았다. 그러다가 조선태종 때부터 본업이 매춘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이에 격분한 샌님들이 창기(娼妓)를 없애자고 설레발쳤고, 몸 둘 바를 모르던 일부 관리들은 여염집 담을 넘어 규수와 내통했다. 조선후기엔 서울과 평양 등지에 '갈보'라고 불리는 직업 매춘부들이 유곽을 차렸다. 갈보의 갈(蝎)은 중국에서 온 말로 밤에 출몰해 사람의 피를 빨아먹는 취충(臭蟲·빈대)을 뜻한다. 계집아이들을 데려다가 오입을 가르치고 영업을 시작한 홍등가의 등장은 일본 군대가 진주한 구한말부터다. 이때 나온 속요 '신아리랑타령'은 이렇게 성(性)을 희롱한다. '전답 좋은 것은 철로(鐵路)로 가고 계집애 고운 것은 갈보로 간다.'

 

▶“몸뚱이 가릴 옷조차 없는 젊은 계집에게 정숙(貞淑)을 바랄 수 있을까/전쟁으로 인해 나는 천애의 고아가 됐다. 배가 고팠다/그래서 '안나'라는 갈보가 됐다./한 끼 밥을 먹기 위해서 내 몸뚱이를 파먹고 28년을 살아왔다/갈보라는 직업에 죄가 있다면 그건 결코 내가 짊어져야 할 죄가 아니다.”/ 오영수 소설 '안나의 유서' 중에 나오는 글이다. 이처럼 유곽의 은근짜(창녀)는 탕아들의 화대를 받아 입에 풀칠할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이 가난한 농촌여성이었기 때문이다. 붉은 등불 아래 속속곳(아랫도리 속옷) 까부르는 소리, 담배 연기, 술 냄새, 요란하게 흐르는 장단, 교태부리는 웃음소리…. 이렇게 나비는 사창(私娼)의 꽃에게 몰려들었다. 배고픔과 외로움을 견디지 못한 이들 가슴엔 커다란 공동(空洞)이 생겼고 이 상실감을 무언가로 충당해야만 했다. 그래서 창녀는 죄악이 아니라 감당해야만 할 온전한 삶이었다.

▶김용민과 김구라의 발칙한 어록이 세상을 욕보인다. "라이스 강간, (여자 성기)XX 오징어, 부자(父子) 구멍동서, 떡을 마누라하고만 치나, 조(남자 성기) 퍼포먼스, 뉴욕 자유의 여신상 XX에 미사일….” "XX게 모래바람 먹는 노가다 십장 대통령, 창녀 같은 위안부, 시청 앞에서 X랄하는 노친네들, 한국을 조진 100인의 개XX들…." 국민욕쟁이라는 타이틀을 자랑스러워하는 쪼다들의 막말이다. 입의 괄약근이 풀려 부끄러움도, 염치도 없다. '말(言)'을 팔아서 인기를 끌려는 것이니 이게 진짜 꼼수다. 입에 필터라도 달아주고 싶지만 이런 욕지거리에 박수치는 군상들이 많다. 이들을 욕하는 자가 욕먹는 시대다. (어쨌거나) 김용민이 낙마하던 날, 나는 만세를 불렀고 흥에 겨워 소주를 진탕 마셨다.

 

▶벚꽃, 목련, 개나리, 진달래의 공통점은 잎보다 꽃을 먼저 피우는 '성질 급한' 꽃나무라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지난해 축적해둔 에너지를 사용해 꽃부터 '출시'하고 꽃이 질 무렵에야 잎을 만든다. ‘잎’을 파는 것이 아니라 ‘꽃(봄)’을 파니까 매춘(賣春)이다. 요즘 사회적 이슈가 있을 때마다 공인(公人)들이 따따부따 정치를 한다. 공인은 공공의 거울이다.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목소리로 똑같은 말을 해도 사람들은 공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말(言)을 팔고 소리를 파니 매음(賣音)이다. (무엇이든) 까발리기는 쉽다. 욕하기는 더 쉽다. 하지만 입에서 나오는 대로 다 내뱉으면 걸레다. 걸레는 빨아도 걸레다. 수건이 될 수 없다. 입이 헤픈 것과, 말이 헤픈 것과, 몸이 헤픈 것과 무엇이 다른가. 육신과 정신의 차이일 뿐….

Posted by 나재필
   
 
▶어두컴컴하고 날선 소음, 먼지에 찌들어 숨이 턱턱 막히는 공장. 하루해가 저물었는데도 공작기계는 쌩쌩했다. 컨베이어에 실려 끝도 없이 나오는 부품들을 조립하다보면 여공(女工)들은 화장실 갈 틈조차 없었다. 일하고 또 일하고, 일하다 다시 일하고, 잠시 잠을 자고 와서는 다시 일하고 또 일하고…. 잔업을 해서 한 푼이라도 더 받아야 시골에 있는 ‘동생들 학비’를 마련할 수 있기에 쉴 수도 없었다. 천근만근의 몸을 이끌고 뚜벅거리다가 만난 붕어빵 리어카. 입에 침이 고이지만 '붕어'를 살 수는 없었다. 그 붕어빵 값이면 동생의 주린 배를 조금은 채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똑바로 설 수조차 없는 2층 다락방. 온통 절뚝거리는 어둠뿐인 그곳에서 그녀들은 책을 읽으며 희망을 꿈꿨다. '열심히 일해서 가족들과 함께 모여 사는 것. 그 날이 올 때까지 참는 거야.' 60~70년대 '한국의 기적'은 그렇게 중졸과 고졸들이 공장에서 피땀을 흘려 일궈낸 것이었다.

▶26년 전 요맘때 나는 공작기계가 돌아가는 어느 철공소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땟국이 흐르는 작업복, 피멍 든 팔뚝, 기름때 묻은 얼굴을 하고 있는 노동자의 모습을 지켜봤다. 당장이라도 공구를 집어던지고 사라질 것 같은 그 퀭한 얼굴에서 나는 희망을 찾고 있었다. 하루빨리 돈을 벌고 싶어졌다. 고교과정을 마치고 대학, 군대까지 다녀오면 언제 돈을 벌 것인가. 막연하고 어리석었지만 가출을 결심했다. 그러나 줄행랑친 부산에서 단 하루도 버티지 못했다. 추위와 배고픔, 그 가벼운 생존의 한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귀가하고 말았던 것이다. 하루짜리 의식주도 스스로 이겨내지 못하는 작자가 무슨 돈을 번다는 말인가. 사회가 요구하는 '가방끈(학력)'이 필요했다. 어떻게든 '고졸(高卒)'은 떼야했다.

▶요즘 '학력파괴'가 뜨고 있다. 몇몇 기업과 은행들의 고졸 채용 방침이 알려지자 학생들이 '진학보다는 취업' 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큰 희망까지 품기 시작했다. 그런데 과연 그 '가방끈 파괴'가 얼마나 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학벌=능력'이라는 인식 틀을 획기적으로 깨지 않는 한 일시적인 이상 현상일 뿐이다. 상고(商高) 출신 대통령. 그러니까 김대중 전 대통령(목포상고), 노무현 전 대통령(부산상고), 이명박 대통령(포항 동지상고)이 세 번 연거푸 대권을 잡은 이후라 마치 설레발을 치는 모양새다. 사실 대학 졸업장을 손에 쥐고 사회에 나와도 직장 잡긴 힘든 세상 아니던가. 일단 기업들의 '고졸 사랑'이 반갑기는 하지만 미덥지만은 않다.

▶여러분은 고등학교 종류를 아시는가? 솔직히 난 똑 부러지게 모른다. 아니, 머리가 아프다. 일반고, 특목고(외국어고, 국제고, 과학고, 예술고, 체육고, 마이스터고), 특성화고, 자율고(자율형 사립고, 자율형 공립고….) 그 옛날 인문계와 실업계로 나뉘었던 때를 생각하면 너무 복잡해졌다. 마이스터고는 '취업 특성화 고교.' '특성화고'는 예전 공고(工高)나 상고(商高)다. 특성화고 학생 10명 중 4명이 대학진학 대신 취업을 선택하고 있다고 한다. '대학 가봤자 별 소용없고 취업이 우선이다'는 인식 때문이다. 취업난이 심각한데다 대졸자 임금도 생각보다 높지 않은 것도 이유라면 이유다. 4년제 대학을 나와도 절반 밖에 취업을 못하고, 취업을 해도 50% 정도가 월 100만 원대의 월급을 받으니 그럴 만도 하다. ‘가방끈’이 먼저인지 ‘돈줄’이 먼저인지, 겪어봤는데도 도통 모르겠다.


Posted by 나재필


▶우리 집엔 자전거가 네 대 있다. 비오면 비를 맞고 눈이 오면 눈을 맞더니 이제는 '삭신'에 녹이 슬어 고물이 됐다. 한때 20㎞의 속도로 두 발의 안위를 살펴준 고마운 이동수단이었는데 퇴물이 된 것이다. 거치대가 없는 아파트에 네 대를 놓자니 관리도 어렵고 탈일도 없어 처분키로 했다. 자전거포에서는 거저 주면 모를까 값을 쳐줄 수는 없단다. 어쩔 수 없이 고물상을 찾아갔는데 그 흥정이 고깝다. 자전거 상태도 묻지 않고 대당 3000원을 주겠다고 했다. 쓸 만한 한 대를 빼고 세 대를 팔 심산이었으니 (3000원 x 3=9000원) 자전거 세대 값이 고작 9000원이었다. 에계계~. 엿하고 바꿔먹어도 그 정도 값어치는 넘을 듯싶었다. 결국 흥정을 깼다. 며칠 후 3개월간 구독했던 신문지(파지)를 들고 고물상에 갔다. 근수(斤數)를 재더니 9000원을 주었다. 자전거 세대 값과 신문 3개월 치가 똑같았다. 오 마이 갓~.


▶고물상에 동행했던 아내가 고물 판값으로 수제비를 먹자고 했다. 나는 일언지하에 거부했다. 자전거 세대 값으로, 신문 파지 3개월 치 돈으로 수제비를 먹을 수는 없었다. 대신 집에서 520원짜리 안성탕면을 끓여주었다. 속으론 무척 미안했다. 아니 미안했다기보다는 쪽팔렸고 아렸다. 하지만 어쩌리. 고물을 팔아 얻은 9000원이 그렇게 커 보이는 걸. 예전 학창시절에도 공병(빈병)을 팔아 푼돈을 마련한 적이 있다. 수십 개의 공병을 모아봤자 2000원 안팎이었지만 그 '고물'은 한 끼의 라면도 되고, 열 구간의 차비도 됐다. 이처럼 '고물'은 낡거나 헌 물건을 말하지만 때론 '보물'도 된다. 고철이나 극젱이, 고장 난 밥솥, 유행 지난 헌 옷, 구식 라디오…. 물건 값도 천차만별이어서 단돈 몇 백 원짜리부터 몇 십만 원짜리까지 있다. 값의 흥정은 따로 있지 않다. 눈금이 거의 보이지 않는 낡은 저울과 주인의 눈대중이 전부다. 그러니 손에 쥐는 것은 '어림잡아' 몇 푼이다.

▶고물상이라는 이름에는 외환위기로 인한 대량 실직 등 국가가 감당하지 못한 복지의 중층적 모순들이 오롯하게 투영돼 있다. 버려진 도시빈민, 버림받은 농촌 실업자가 넝마주이를 시발로 우리나라 재활용산업의 문을 열었다. 고물은 버려지는 것들에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창조물이다. 절제와 검약의 반듯한 정신이기도 하다. 간식으로 머루랑 다래랑 먹을 수는 있겠으나, 그것으로 주식을 삼자면 배가 고파 살수 없다. 부자에게 고물은 퇴박맞은 물건이지만 빈자(貧者)에게는 검박한 보물이다.

▶국감이 진행 중이다. 지금 국회에 계류 중인 미료(未了) 안건은 6000건이 넘는다. 18대 국회에서 발의된 안건은 1만2312건으로 역대 최다이며 17대 국회의 두 배에 가깝다. 그러나 이 중 가결된 안건은 15%에 불과하다. 대다수가 공중에 뜬 상태다. 의원 개개인의 입법 구상을 혼잣말 주절대듯 쏟아놓은 안건이 '고물'처럼 쌓여 있는 것이다. 고물은 쓸모없을 때 버려진다. 국회가 본연의 구실을 잊고 365일 딴눈을 판다면 고물과 무엇이 다르리. 단풍의 미덕을 생각해보라. 단풍은 제 몸을 바람에 태워 고적한 즐거움을 안긴다. 내년에 더 나은 빛깔을 보여주기 위해 단풍은 스스로 잎을 떨어뜨려 퇴비가 된다. 처절하리만큼 아름다운 자기희생이다. 우리가 고물을 업신여기지 말아야 할 이유는 '배고파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배부르게' 하기 때문이다.


Posted by 나재필
▶예전엔, 예전엔 말이다. 여자에게서 향기만 나는 줄 알았다. 너무나 연약해 깃털처럼 사는 줄 알았다. 너무나 순결해 고운 말만 쓰는 줄 알았다. 너무나 고상해 이슬만 먹고 사는 줄 알았다. 너무나 새침해 술은 입에도 못 대는 줄 알았다. 너무나 지순해 자수나 놓으며 은인자중하는 줄 알았다. 너무나 조신해 남자보기를 돌같이 여기는 줄 알았다. 심지어 화장실에도 안가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점·점·점(···생략). 500년간 남자들의 횡포와 사매질에 짓눌려 살던 여자들의 치맛바람이 예사롭지 않다. 속속곳의 내숭이 사라졌다. ‘한 남자’의 총애만 기다리지 않는다. 세상의 뒤꼍에서 걸근거리지도 않는다.

▶"이천만 동포형제가 신식을 좇아 행할 사이, 어찌하여 우리 여인들은 귀먹고 눈 어두운 병신 모양으로 침실만 지키고 있는가." 113년 전 서울 북촌의 양반부인 300명이 작성한 선언서다. 이 통문(通文)은 '남자는 눌렀고 여자는 눌렸다'는 고정관념을 깨버렸다. 프랑스 극작가 올랭프 드 구즈는 1791년 '여성 권리선언'과 공포정치에 대항하는 평론을 냈다가 단두대에서 처형됐다. 효종의 딸 숙정공주는 스물셋에 요절했는데 3년 연하의 남편이 '재혼을 허가해 달라'며 상소를 올렸다. 왕은 '오케이'했는데 신하들이 펄펄 뛰어 홀아비로 살다 죽었다. 숙종 때 가정주부 신태영은 남편에게 소박맞고는 예조(禮曹)에 이혼을 청구했다. 하지만 9년 소송의 결과는 귀양살이였다. 역사는 여자들에 대해 너그럽지 않았다.

▶여자들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진 만큼 콧대도 높아졌다. '하이(high)힐'의 높이만큼 자존감도 '하이(high)'다. 그러다보니 무서워졌다. 수줍음이 미덕이었다면 이제는 부끄러움을 타지 않는다. 담벼락에 구멍을 내고, 변기를 깨뜨렸다고 허세를 부리는 '복분자남'들이 밉상이더니 요즘엔 여자가 사회 관념에 구멍을 내고 있다. 여자가 '무서워진 것'은 남자가 '우스워진 것'이다. 손 한번 잡아도 한없이 가슴 떨리던, 미쁜 말 한마디에 까만 밤 하얗게 지새던 '고전(古典)의 여성성'이 사라졌다. 외양(外樣)은 장미 같되, 내면이 호박 같다면 그 여자는 '호박'이다. 외양은 똑똑해졌으나 내면은 툭툭해진 것이니…. 화장으로 흠은 감출 수 있을지 몰라도 내면의 결핍마저 감출 수는 없다.

▶푸른 멍처럼 파리한 새벽이 시나브로 남자를 깨우고 있다. 남자가 앞치마를 두른다. 옷가지를 세탁기에 집어넣는다. 주전자에 보리차를 넣고 물을 끓인다. 이내 설거지 품새로 돌아선다. '퐁퐁'의 양이 중요하다. 너무 적으면 뽀드득 소리가 안 나고 너무 많으면 헹구는데 오래 걸린다. 설거지는 보통 40분 정도 걸린다. 세탁이 끝나려면 20분 정도 더 기다려야 한다. 이 자투리는 빨래를 개는 시간이다. 세탁 종료 알람이 울리면 베란다 바지랑대에 세탁물을 널기 시작한다. 중요한 것은 탁탁 털어서 널어야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을 생략하면 빨래가 건조됐을 때 주름살 펴기가 곤혹스럽다. 집안청소는 아침일과의 대미다. 이렇듯 여자가 '놀부'가 되어가는 사이 남자들은 ‘주부’가 되어가고 있다. 추석 명절은 잘 쉬셨는가? 남자들이 행여 허드렛일을 돕지 않고 배짱을 부리던가? 아니면 팔짱을 끼고 있던가? 고까워도 행짜는 부리지 마라. 요즘 남자들, 안팎으로 불쌍해지고 있잖은가.


Posted by 나재필
▶한때 사이버공간을 뜨겁게 한 이야기가 있다. 시골 아버지가 대학생 아들에게 꼬박꼬박 부치던 용돈을 끊었다. 아들이 전보를 쳤다. '당신 아들, 굶어 죽음.' 아버지는 이런 답장을 보냈다. '그래, 굶어죽어라.' 화가 난 아들은 연락을 두절한 채 이를 악물고 노력했다. 세월이 흐른 다음에야 아들은 아버지 전보가 성공의 전기(轉機)가 됐다는 것을 깨닫는다. 서둘러 고향집을 찾았으나 이미 아버지는 세상을 떴고 유서 한 장이 남아 있었다. '아들아, 너를 기다리다 먼저 간다. 네가 소식을 끊은 뒤 하루도 고통스럽지 않은 날이 없었다. 언제나 너를 사랑했다.' 보통 아버지들은 정(情)을 드러내지 않는다. 속은 깊은데 겉으로 표현하지 않는 것이다. 나도 아들을 키워보고서야 알았다.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찬밥 한 덩이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 썩여도 끄떡없는,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한 것이 그냥 넋두리인 줄만 알았습니다. 한밤중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 죽여 울던 엄마를 본 후론. 아!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심순덕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엄마를 부탁해'라는 소설을 쓴 신경숙의 어머니(74)는 문맹(文盲)이다. 딸은 가끔 제 소설을 읽어드리지만 어머니는 금세 코를 곤다. 신경숙은 ‘어머니가 졸지 않을 만큼 재미난 이야기를 쓰겠다’는 일념에 베스트셀러 집필을 결심했고 그것이 성공의 모태가 됐다.


▶어머니 때문에 운 적이 많다. 어머니라는 단어만 나와도 온몸이 울었다. 자식 때문에 수없이 울었을 어머니 때문에 울었다. 그동안 그런 마음을 내색하지 못하고 살아온 삶 때문에 울었다. 어머니의 아득한 깊이를 헤아리지 못해 울었다. '천금 같은 내 새끼'로 살아온 뻔뻔함 때문에 울었다. 소싯적 호강시켜드리겠다고 가출했는데 그 날이 어머니 생신인 걸 알고 울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아버지 때문에도 울게 됐다. 낡은 자동차를 몰고 헤어질 때 눈물이 난다. 얼굴에 세월의 깊디깊은 밭고랑이 생긴 걸 발견했을 때 눈물이 난다. 앙상한 뼈마디에 찬바람이 몰아치는 것 같아 눈물이 난다. 화가 나시면 두 눈에 불꽃이 튀시던 강골의 아버지가 약골이 돼서 눈물이 난다. 왜 사람들은, 아니 나는 왜 이 모양일까. 인생이 허무한 건 짧아서가 아니라 너무 늦게 깨닫기 때문이라고 하던데….


▶오늘은 어린이날이다. 글피는 어버이날이다. 사흘 간격으로 잔치가 벌어진다. 그러나 웃음이 나지 않는다. 아들로 살 때는 몰랐다. 부모가 늘 상처를 안고 살면서도 내색하지 않았다는 것을. 대놓고 걱정하거나 슬퍼할 수도 없었다는 것을.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보이지 않는 눈물이 더 많다는 것을. 그런데 자식을 키워보니 알겠다. 아버지가 가장 외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아이를 키워보니 알겠다. 어머니가 가장 외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어머니의 희생이 자식의 성공이 되었음을. 그런데도 마음밖에는 없다. 마음밖에 없으니 괴로운 것이다. 한바탕 장난을 치고 잠이 든 아이들의 얼굴을 내려다본다. 사랑한다고 말은 안했지만 한없이 사랑스럽다. 아, 우리 부모가 이랬구나. 아, 우리 부모가 이렇게 짠했구나. 부모님께 표현한 적은 없지만 용기를 내본다. … … ….

 '사랑합니다.'
Posted by 나재필

연인

잡동사니 2010.12.21 15:23

▶"내가 그 기집애와 동거를 시작한 방은 우물보다 낮은 방이었다." 최인호 중편소설 '두레박을 올려라'는 가출한 남자 대학생이 소매치기 여자와 지하 단칸방서 동거하는 얘기다. 사랑을 갖고 놀던 탕아(蕩兒)는 결국 집으로 돌아간다. 셰익스피어는 8살 연상의 아내를 그다지 사랑하지 않았다. 그는 유언장에서 친구와 이웃에게는 온정을 베풀면서도 '집사람에겐 두 번째로 좋은 침대만 주라'고 했다. 가야금 명인 황병기의 아내이자 소설가인 한말숙은 가상 유언장에서 '남편의 재혼은 안 된다'고 못 박았다. 수필가 육상구는 '세상에 두 번 태어나서 행복하게 살다가 떠나오. 어머님으로부터 태어나 반평생을 살고, 당신을 만나 반평생 동안 복락을 누렸소'라고 읊었고, 시인 정호승은 '미안하다.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이처럼 사랑의 종류는 하나이나, 표현방법은 수만 가지가 넘는다.

▶젊은 시절 상투적인 호기를 부리던 때가 있었다. 이십대에 '블루'라는 애칭의 중고자동차를 샀다. 어느 날 이 차를 몰고 무작정 동해를 향해 액셀을 밟았다. 댓바람에 달린 시속 80㎞는 청춘의 속도였다. 첫사랑 여자는 행방도 모르고 동행했다. 한적한 바닷가, 모딜리아니의 그림을 닮은 길쭉하고 신비한 그녀와 소주를 불고 밤바다를 유희했다. 그녀는 온전히 마음을 열지 않았지만 그 때 보았던 그 별빛만큼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첫사랑은 덧없이 사라지는 ‘찰나’다. 마치 낙인처럼 가슴속에 담아두려는 첫사랑은 실은 잊어야 할 목록이다. 배우자와 애인 몰래 추억을 보관하는 '첫사랑 표본실'이야말로 위험한 기억인자로 남아 훗날 사랑을 잡고, 사람을 잡는다. 긴 세월 동안 숱한 필부필부(匹夫匹婦)들 가슴에 불을 댕기는 첫사랑이지만 지금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면 깨끗이 지워야한다.

▶연애시절, 지갑을 잃어버려 ‘병팔이’가 된 적이 있었다. 지금의 아내와 사귀고 있었을 때인데 자취방을 쥐 잡듯이 뒤져봐도 동전하나 없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빈병을 팔아 소주 한 병과 라면을 샀다. 우린 팅팅 불어터진 라면을 먹으며 겉으론 웃고 속으론 울었다. 이후 월세 5만 원짜리 단칸방에서 시작한 예비 결혼생활은 행복했다. 헛기침 소리로 사용 유무를 알리는 뒷간, 푸성귀를 길러 먹을 수 있는 텃밭이 있었다. 영화관에 가는 대신 홈비디오를 보고, 커피숍 대신 커피믹스를 먹는 2인분의 삶, 포플린 이불 위에서 쪽잠을 자더라도 좋았다. 빤히 들여다보이는 가난, 슬픔이 가득했는데도 좋았다. 하루에 한 번 샤워해야 하는 여자의 자존심을 채워주지 못한 것을 빼고는.

▶인생 마라톤 42.195㎞에서 다시 오르막을 가고 있다. 정확히 보면 체력이 빠지는 25㎞ 지점인 듯하다. 속도가 떨어져 내내 가쁜 숨을 내뱉는다. 이 무거운 삶의 레이스에서 가족(핏줄)이 없었다면 어찌됐을까. 언제부터인가 내천(川)자로 자고 있는 아내와 아이들을 보면 괜스레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 해준 것이 없고, 해줄 것이 없어서가 아니다. ‘인연’을 맺어 ‘연인’이 되었고 ‘장가’를 가서 ‘가장’이 되었지만 좀 더 멋지지 못해서다. 고작 새벽녘 이불을 걷어차고 자는 식솔의 배를 덮어주는 일종의 면책행위를 할 뿐이다. 다행인 것은 아직까진 ‘아빠, 나빠'라는 말을 듣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글자를 떼어내 조합하면 ‘살아가는’ 것이 된다. ‘인생 42.195㎞’는 혼자 뛸 수 있지만, 함께 뛰는 사람이 있다면 조금은 가벼워질 수 있다. 지금 옆자리를 확인해보라. 누가 함께 뛰고 있는지.

Posted by 나재필


 고향은 어머니 품이다. 바람 한 점, 풀꽃 하나 정겹지 않은 것이 없고 산과 물 또한 넉넉한 가슴으로 받아준다. 타향살이에 잠시 고향을 잊는다 해도 내치지 않고, 지친 몸을 이끌고 낙향해도 그동안의 부재(不在)를 캐묻지 않고 품어준다. 마치 자식의 따뜻한 끼니를 위해 아랫목에 묻어놓은 ‘밥(마음)’같은 존재다. 영동군 황간면 월류봉을 품은 솔티마을(원촌리)이 바로 그런 고향의 원류(源流)다. 이곳에 가면 정겨운 인심과 풍경이 있다. 봄, 여름을 지나며 알알이 씨알을 키우고 있는 포도밭과 감나무들도 반긴다. 솔티마을은 이미 TV속 연예프로그램이나 드라마를 통해 알려진 곳이다. KBS 해피선데이 '1박2일'팀의 강호동과 은지원, 이수근, 지상렬 등이 천방지축으로 돌아다니며 천렵과 복불복(福不福) 게임을 하던 곳이고, '해신'의 검객들이 월류정 백사장 앞에서 검술을 겨루던 곳이다. 드라마 '포도밭 그 사나이'에서는 윤은혜와 오만석이 시골 처녀총각으로 나와 풋풋한 사랑얘기를 들려줬다. 특히 '1박2일' 팀의 경우 2007년 8월 5일 첫 회를 이곳에서 촬영했고, 1년 후 다시 찾을 만큼 마음의 고향이 된 곳이다. 여름 휴가지로 산과 바다 못지않게 즐겨 찾는 곳이 강(江)이다. 강폭 가득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바라보노라면 한여름 무더위는 간데없이 씻겨지는 법이다.



   
자동차는 황간 IC서 나와 우회전한다. 여기서 백화산 반야사 쪽으로 접어들면 곧바로 한 폭의 풍경화가 펼쳐진다. 기암절벽과 봉긋 솟은 봉우리가 물과 산을 휘감아 돈다. 마치 중국의 계림(桂林)에 온 듯한 착각에 빠진다. 이런 목가적인 풍경은 논둑길로 이어진다. 감나무와 벽오동 나무가 돌담길 곁으로 고즈넉이 자리하고 누군가가 살았을 빈집의 흔적은 호젓하다. 유년의 땅따먹기, 말 타기, 고무줄, 자치기, 비석치기, 구슬치기로 고샅을 점령했던 그 돌담길이다. 모든 추억들이 낙엽처럼 복사돼 눈앞에 쏟아진다. 물소리, 바람소리, 새소리가 청신하다. 마을 어귀를 돌아 조금 걸으면 월류봉이 보인다. 금강이 휘돌고 소백산이 병풍처럼 서 있는 땅이다. 도마령의 굽이치는 산줄기와 월류봉의 돌아드는 물줄기가 만난다. 이 초강천은 절대 거칠지 않다. 큰 바위에 떼를 입혀놓은 듯한 절벽 아래로 흐르지만 햇살에 비춘 물여울은 부드럽다.

한천팔경은 우암 송시열 선생이 머물던 한천정사(寒泉精舍)에서 이름을 따왔다. 조선 후기 노론의 영수이자 주자학의 대가였던 송시열은 봉림대군의 사부로, 우의정까지 지냈지만 잦은 모략과 밀고로 세 번 넘게 낙향했다. 이때 청주와 영동에 내려와 은거생활을 했는데 특히 병자호란 직후인 32세 되던 해에는 월류봉 앞에 은둔하면서 강학을 했다.

월류봉 정자는 한천팔경의 화룡점정이다. 달님도 쉬어간다는 월류봉은 절벽이 공중에 솟아 높고(400.7m) 수려하며 그 봉우리에 달이 걸려있는 정취는 진실로 아름답다. 봉우리를 올라서면 한반도 형상을 닮았다는 원촌리의 풍광을 볼 수 있다.(등산은 월류정~월류봉 산신당~청학굴~전망바위~월류5봉~월류 4,3,2,1봉~삼거리 갈림길, 초강천 건넘(감나무 식당앞)~송시열 유허비~기미정~주차장:2시간 30분 소요).

   
봄에 진달래와 철쭉으로 산이 붉어지면 홍조를 띤다하여 화헌악(花軒岳)이라 했고, 용연동(龍淵洞)은 월류봉 아래의 깊은 소를, 산양벽(山羊壁)은 월류봉의 깎아지른 절벽을 가리킨다. 이 기묘한 모양의 산봉우리는 동서로 능선이 뻗어 있어 6개의 봉우리가 어깨동무를 한듯한 자세를 하고 있다. 북쪽은 냇물을 따라 깎아 세운 듯한 절벽을 이루고 남쪽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월류봉 아래 백사장은 드라마 '해신'으로 알려졌지만 오랜 세월 부서지고 용화된 백사장은 넓고 아늑하다. 이 물은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를 가르는 덕유산 줄기인 삼도봉과 민주지산에서 발원한 물줄기다. 초강천은 물이 맑고 차기로 유명한 물한계곡을 이루고 다시 추풍령 계곡물과 만나 월류봉으로 흘러든다.

월류봉을 곁으로 자그마한 신작로가 나 있는데 솔티마을(원촌리)가는 길이다. 길옆으로 포도밭이 엉겨있고, 시골풍경이 예스럽게 펼쳐져있다. 다랑이(논배미)는 낙폭을 두고 가지런히 정돈돼 있다. 이미 벼는 한 뼘을 지나 어린아이 티를 벗었다. 길은 지루하지 않을 정도이니 짐작으로 500m 길이일 듯싶다. 그 길을 걷는 동안 추억의 시골길이 생각난다. 추억속의 시골길은 천렵이나 군입정하기에 좋았다. 길 가다가도 아카시아, 진달래꽃, 무, 찔레줄기 등을 따먹고, 더덕이나 도라지, 머루나 달래도 먹었다. 으름, 깨금(개암) 등도 별미였다. 나무 마다 친친 감고 올라선 으름은 석류처럼 쩌억 벌리고 익어 바나나맛이었
   
다. 겨울 끝자락엔 개밥나무(버들강아지) 열매를 따서 껌처럼 씹었다. 처녀종아리처럼 통통하게 익은 무도 군입질에 좋았다. 입안에서 서걱거리는 달짝지근한 맛은 복분자(산딸기)나, 뽕나무 오디 맛에 버금갔다. 잠시 여름날의 추억이 패잔병처럼 길게 드리운다.

길 옆 포도밭에서는 아낙들이 포도 솎아내기를 하고 있다. 캠벨포도인데 9월 중순경에 포도 따기 체험행사도 하고 구입도 가능하다. 아낙들의 말씨엔 경상도와 충청도의 방언이 녹아있다. 이는 충북 영동과 경북 김천·상주가 접경인 탓이다. 타지인이 와서 귀찮게 물어봐도 싫은 내색이 없다. 후박한 인심과 넉넉한 입심이 더해 푸근하다. 50대가 젊은 사람에 속한다고 할 만큼 노동의 대부분은 나이 드신 분들의 몫이다. 가는 길은 수십 굽잇길이 있는 게 아니다. 숲 전체에 그늘을 겹겹이 쌓아 뜨거운 햇볕이 뚫을 틈이 없다.

원촌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앞에 보이는 것이 기룡대(起龍臺)라는 정자와 느티나무다. 이곳이 바로 '1박2일'팀이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짓궂은 게임을 하던 장소다. 옹기종기 팔짱을 끼고 있는 마을 곳곳에 감나무가 보인다. 영동은 감나무로도 유명한 고을이다. 영동 읍내의 가로수가 온통 감나무로 가꾸어져 있기 때문에 가을이면 감이 주렁주렁 달린 이색적인 경관이 펼쳐진다. 영동 감은 일명 ‘먹감’이라고도 하는 둥시와 영동월하시가 있다. 2~3개의 씨가 들어 있는 담홍색의 감은 18.5도 정도로 당도가 높아 연시로도 곶감으로도 맛이 좋다.

느티나무 아래로 바람이 분다. 본디 영동은 바람 또한 많은 고을이다. 그런 까닭인지 이곳에는 바람의 신(神)인 영동할미에게 제사를 올리는 풍습이 오래 전부터 전해져왔다. 음력 2월 초순에 바람이 세게 불면 나이 든 노인들은 '영동할미가 온다'고 말한다. 마음 착한 관리의 넋이 바람으로 변해 원을 풀려고 한다는 영동할미 이야기는 부패한 현실을 꾸짖는 이야기다.
   

수십 갈래로 뻗은 느티나무. 줄기는 바람을 따라, 햇볕을 따라 뻗어있다. 마치 곡예사의 흰 밧줄 같다. 나무를 비켜간 바람은 논두렁 쪽으로 튕기듯이 간다. 솔숲이 짙고 솔향이 깊다. 뭐 하나 버릴 것 없다는 '괴목' 느티나무는 냉풍기다. 솔풍이 불어 시원하다. 바람이 맛있다는 것을 깨우친다. 더구나 춥지도, 덥지도 않다. 적당히 서늘한 바람이다. 당일 온도가 30도를 웃돌았는데 정자 아래 체감온도는 20도다. 한여름에 10도면 꽤 큰 차이다. 그만큼 여름에 가기 좋다는 말이다.

정자 아래서 고기를 구워먹고 하룻밤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다. 사람이 사는 동네인데도 인간의 때를 타지 않은 자연을 닮아 좋다.

솔티마을엔 2개의 마을공동 민박집이 있다. 지자체에서 2억 원을 지원받아 최신식 2층으로 지었다. 층당 20~30명 숙박은 거뜬할 듯싶다. 이 민박집은 부녀회에서 관리·운영하고 수익금은 마을회비로 쓴다. 1층은 평소에 마을회관 및 경로당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 마을 부녀회장 송삼순 씨(010-6557-2578)에게 연락하면 숙박 일체에 대해 알려준다. 솔티마을은 녹색체험마을로 지정돼 매년 들국화축제가 열린다.

솔티마을을 나와 다시 초강천에 접어든다. 개울은 물길이 완만하고 얕은 곳이 많아 물놀이하기에 좋다. 천렵을 해도 좋으나 물고기는 많아 보이지 않는다. 처음 솔티마을 여행을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이 천렵이었다. 개울가에서 빠가사리, 동자개, 메자, 꺽지, 꾸구리 등 물고기들을 잡을 생각에 들뜬 것도 사실이다. 여기에 파, 깻잎 매운 고추 등을 넣고 매운탕을 끓여먹을 요량이었다. 봄에는 껍죽이와 뚜거리, 여름은 빠가사리, 가을은 모래마주, 왕눈이, 메기, 모래무지 아니던가. 그러나 오른손으로 돌멩이를 들추며 젓가락 휘젓듯 해봐도 물고기는 보이지 않는다. 자꾸 물속이 자욱하게 흐려질 뿐이다.(그러나 물고기가 아예 없는 건 아닐 게다)

결국 천렵을 포기하고 강호동과 은지원 등이 매운탕을 먹던 월류정 앞 식당에 들렀다. 이곳서 빠가사리(동자개) 매운탕을 시켰다. 물에서 잡아 올릴 때 '빠각빠각' 소리를 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일명 '자개미'로도 불리는데 물 흐림이 느린 강바닥에 주로 살기 때문이다. 어른 손가락 굵기에 길이는 20㎝ 남짓. 얼핏 큰 미꾸라지 크기지만 주둥이가 넓적한 게 다르다. 매운탕으로 끓이면 시원한 국물 맛에 야들야들한 육질이 별미다. 가격도 여느 매운탕집보다 비싸지 않다.

여행의 피날레로 초강천에서 물수제비 내기를 했다. 게임에서 진 사람이 입수하는 조건이었는데 결국 졌고 입수했다. 아련한 추억들이 몸속에서 유영한다. 젖은 몸으로 다시 강가에 앉는다. 거울처럼 투명한 강 위로 햇살이 반짝이고 각기 다른 녹(綠)의 농담으로 이어진 여울의 흐름이 한가롭다. 물고기를 잡지 못해 안달 난 마음은 이내 수그러든다. 그 한가한 풍경에 몸을 녹인다. 달 밝은 밤에 망탑(기룡대)에 오르면 천지의 기운이 온 가슴을 적신다 하니, 언젠가는 달이 휘영청 밝은 밤에 월류봉에 오르리라는 결심도 한다. 사람은 '잃어버린 고향을 찾기 위해 타향으로 간다'고 했다. 고향으로 온 여정은 타향생활을 잠시 잊게 했다. 동시에 타향을 그립게도 했다. 고향을 보며 귀향을 생각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여정을 끝내며 또 한번 술에 취할 수밖에 없었다.
Posted by 나재필
27일 6.2지방선거 부재자 투표가 전국적으로 일제히 시작된 가운데 계룡시청에서 군인들이 투표를 하기위해 대기하고 있다.김호열 기자 kimhy@cctoday.co.kr

▶660년 여름. 당나라 소정방의 13만 대군은 북풍을 타고 금강 입구에 닿았고, 신라 김유신의 5만 군사는 지금의 대전과 옥천 사이인 탄현을 넘었다. 계백의 군사는 5000명이었다. 계백은 자신의 사병(私兵) 위주로 급조한 군대를 이끌고 황산벌에서 10대 1의 대결을 벌였다. 그런데도 계백은 다섯 번 싸워 네 번을 이겼다. 만약 양측의 군세가 동등한 수준이었다면 김유신은 계백을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당나라 소정방도 계백군이 전멸한 후에야 상륙했다. 계백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백제 땅을 밟지 못할 만큼 무서워했던 것이다. 여기에 ‘처자식 살해 후 출정설’도 신라 측에서 고의로 조작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어찌됐든 계백은 패장(敗將)이지만 역사에서 충절의 화신으로 남아있다.


▶연산군은 130편의 시를 남긴 예술인이다. 그러나 감정기복이 심해 법도를 무시하면서 충동적으로 행동했고, 신하들의 비판에 변명으로 일관하거나 화를 잘 냈다. 그러다보니 그의 광풍(狂風)에 참살 당하는 일이 잦았다. 이는 어린아이 때부터 애정결핍, 정서불안에 시달리고 왕이 돼서도 생존위협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이후 어머니의 비통한 죽음을 알게 된 후 극단적인 광기와 잔인성은 더욱 포악해졌다. 그러나 광풍은 오래가지 않았다. 반란군이 왕궁을 포위했을 때 신하들은 바깥 동정을 살핀다며 모두 수챗구멍으로 달아났다. 그 누구도 연산군을 위해 목숨을 바치지 않았다. 되레 새 왕인 중종에게 허리 굽혔다. 백성들도 울지 않았다. 세종과 정조 주위에 충신과 인재가 모여든 것은 그들이 운 좋게 시대를 잘 타고 나서가 아니라 1퍼센트 특권층이 아닌 절대다수 백성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를 했기 때문이다.


▶이케다(池田勇人)는 1960년부터 4년간 일본 총리를 지냈다. 그는 교토대학을 나와 지방의 세무서장을 전전하던 변두리 관료였다. 무엇보다 치명적인 약점은 파벌로 꾸려가는 일본식 정당 정치에 능숙하지 못하다는 점이었다. 단명으로 끝날 정권의 특색을 골고루 갖춘 셈이다. 그러나 요즘 일본정치사 교과서들은 하나같이 이케다 총리의 재임 시기를 ‘자민당 황금시대’로 기록했다. 정치적으로 허약한 이케다가 이 같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저자세(低姿勢) 정치' 때문이다. 그는 당내의 정적(政敵)과 경쟁자들에게 무조건 허리를 낮췄다. 야당에게도 마찬가지였고, 국민을 대할 때는 더 고개를 숙였다. 이케다는 정쟁할 시간에 국민소득 향상 정책에 힘을 쏟았다. 때문에 정권 4년 반 동안 일본은 고도성장을 이룩해 세계 제2경제대국이 됐다. 이케다의 ‘저자세’는 결국 정풍(整風)운동이었다.


▶광장을 가득 메웠던 촛불집회가 있은 지 2년이 지났다. 4개월 간 2398차례 집회에 100만 명(경찰 추산)이 참여했다. 이는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 이후 가장 큰 규모의 거리시위였다. 그러나 상처는 아물지 않고 있다. 무려 1000건이 넘는 법정 공방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뉴욕타임스의 니컬러스 크리스토프가 질문한다. “코미디 프로에서 아버지의 뺨을 때리라는 주문이 나왔다. 아버지도 허락했다. 당신 같으면 하겠는가? 때릴 수 있다면 당신은 좌파다. 도저히 못하겠다면 우파다.”

 지금 대한민국은 좌파, 우파가 뒤섞여 노풍, 북풍을 노리고 있다. 그러나 누가 우리 편인가. 바람을 일으켜 승자가 되려는 자들은 가짜다. 촛불을 이용해 바람을 일으키려는 자들은 허풍이다. 유권자여 명심하시라.
Posted by 나재필
▶북풍(北風)=선거철만 되면 바람이 분다. 정가에서 부는 바람인데 때로는 돌풍으로, 때로는 폭풍으로 몰아친다. 국민들은 옷섶을 닫지만 바람은 미친 듯이 파고든다. 그래서 바람난 세상의 민심은 머흘다. 우파는 10년간 북풍을 내세워 바람을 탔고, 좌파는 북한을 넘나들며 '정상외교' 바람몰이를 했다. 대한민국이 '햇볕'과 '바람'에 정신을 놓는 사이, 북한은 미사일을 쏘고 NLL(북방한계선)을 넘었다. 평화적 지원 명목으로 쌀을 주었지만 굶주린 인민에게 ‘밥’은 돌아가지 않았다. 되레 쌀을 팔아 무기로 바꿨다. 이러한데도 역대 정치세력은 선거 때만 되면 북풍을 끌어들인다. ‘저 모퉁이만 돌아서면 통일’이라는 햇볕장사, ‘내일 모레 전쟁이 날지 모른다’는 안보장사를 되풀이하는 것이다. 정치인들이 너무 오랫동안 남북문제를 이용한 결과 국민은 북풍이 지겹다. 이 ‘광기의 정치’를 어쩔 건가.

▶노풍(盧風)=“그동안 너무 힘들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했다. 그러나 원망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하나가 아니겠는가. 화장해서 작은 비석하나 세워라. 퇴임 후 농촌에 돌아와 여생을 보내려고 했는데 잘 되지 않아 참으로 유감이다. 나름대로 깨끗한 대통령이라고 자부했는데 나에 대한 평가는 먼 훗날 역사가 밝혀줄 것이다.” 벌써 1년이 흘렀다. 글피면 노풍(盧風)으로 대통령이 되어 노풍(怒風)으로 떠난 노무현 전 대통령의 1주기다. 정치권의 일대 변혁으로 평가되는 '노풍(盧風)'은 2002년에 불었다. 이 바람으로 노무현 후보는 대역전드라마를 쓰며 '돌풍'을 일으켰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반전시킨 ‘노무현 학습효과’는 그래서 위력적이고 무겁다. 그래서인지 지금의 야당과 진보세력은 노 전대통령에 대한 애도기를 틈타 '노풍'이 불기를 기대하고 있다.


▶외풍(外風)=선덕여왕은 비담의 난(亂) 와중에 승하했다. 오늘날의 총리에 해당하는 상대등 비담이 '여왕이 정치를 잘못한다'며 난을 일으킨 것은 그만큼 신라의 정세가 위중했다는 뜻이다. 귀족사회는 분열돼 있었고 고구려·백제의 협공으로 나라는 피폐했다. 당시 삼국은 동족으로서의 일체감을 갖기는커녕 합종연횡을 거듭하면서 상대방의 왕을 죽이는 전쟁에 광분했다. 이랬던 신라가 삼한을 하나로 통일해 최후 승자가 된 것은 외풍(外風) 덕이었다. '당나라'라는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인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것이다. 통일신라의 출현은 고조선 멸망 이래 계속된 800여년의 전쟁 상황에 종지부를 찍었지만 외세에 의탁한 통일이라는 불구(不具)성을 안고 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그러나 아무리 승자라 하더라도 외세에 의탁한 통일은 진정성이 없다. 진정한 승자가 아니라는 얘기다.


▶세풍(世風)=2002년 9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충청권에 행정수도를 건설하겠다'는 공약 이후 ‘한나라 두 편’이 된 지 벌써 8년이다. 민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자기들끼리 저질러 놓은 일이다. 전황(戰況)은 서로 밀고 밀리며 일진일퇴를 거듭한다. 어쩌다가 세종시가 양자택일의 막다른 골목에 몰렸는가. 두 진영 모두 세종시 문제에 관해 불편한 진실을 말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북풍과 노풍, 세풍(세종시風)이 6·2지방선거의 최대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북풍은 보수층의 결집을, 노풍은 진보층의 단결을 추동하는 맞바람이다. 그러나 바람을 기대하는 정치권은 조심하시라.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 유권자에게도 고하노니 ‘선거풍’을 조심하시라. 바람을 믿다간 바람 맞기 십상이다.

Posted by 나재필
충청투데이 자료사진

▶암행어사가 돼 내려온 이몽룡은 남원부사 변학도의 포학한 정치를 이렇게 풍자했다. “금 술잔에 담긴 향기로운 술은 천 사람의 피요, 옥쟁반에 담긴 좋은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촛대에 촛물 흐를 때 백성들의 눈물 떨어지고,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 소리 높더라". 연산군 때 ‘정붕’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정붕은 나라에서 보직을 내리려고 했지만 거부했다. 그러나 영의정 성희안이 청송부사로 특별히 추천하자 별 수 없이 받아들였다. 정붕이 부임하자 성희안에게서 연락이 왔다. “청송은 산골이라 꿀과 잣이 유명하다고 하니 좀 보내달라”는 부탁이었다. 정붕은 꿀과 잣을 바치는 대신 답장을 보냈다. “꿀은 백성의 벌통에 들어 있고, 잣은 높은 산꼭대기에 있습니다. 일개 시골 사또가 어떻게 그것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성희안은 얼굴을 들지 못했다.


▶중국에서는 명절 때 식구나 친지, 뜻 맞는 사람끼리 월병(月餠)을 나누어 먹는다. 이 월병은 지름이 3척이나 되는 큰 것도 있으며 떡 표면에는 달 속에서 불사약을 찧는 옥토끼의 그림이 그려져 있어 불로장수를 기원한다. 그런데 요즘엔 이 월병 속에 금품을 넣어 주고받음으로써 월병하면 뇌물의 대명사가 돼있다. 사또 밥상에 오를 찬값이라는 뇌물 '치계미(雉鷄米)'부터 포졸들의 짚신값이라는 뇌물 '초혜료(草鞋料)', 형장(刑杖)칠 때 종이 몽둥이로 쳐주는 대가로 요구하는 뇌물 '지장가(紙杖價)', 청렴결백을 기른다는 뜻인 양렴미(養廉米)라는 뇌물마저 있었다. '주는 놈, 받은 놈, 고자질하는 놈' 중 가장 피해가 큰 건 '받은 놈'이다. 로비의 시작은 ‘식사나 한번’이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 밥은 없다. “나만 먹은 건 아니다”고 빼봤자 먹은 건 먹은 거다. 공짜 밥에는 언젠가 탈이 날 무서운 독이 숨어있다.


▶삼김(三金-YS, DJ, JP)은 50년간 대하정치사를 쓴 대한민국 정치의 역정이다. JP(김종필)는 '정치는 허업(虛業)'이라고 했다. '허망하다'는 것이고 '허심탄회하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YS(김영삼)는 정치를 '세(勢)'라고 했다. 정치는 동지들과 함께 세(勢)를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관점이다. DJ(김대중)는 정치를 '생물(生物)'이라고 했다. DJ는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 것이 정치이기 때문에 순간 순간 처세를 잘해야 한다고 했다. 세, 생물, 허업은 삼김의 정치철학이자, 세상을 바라보는 창틀 같은 것이다. YS는 전략가고 DJ는 지략가다. 다행스럽게도 이들은 청렴했지만 YS, DJ의 자식들은 ‘소통령’ 흉내를 내며 ‘대통령 아버지’에게 오점을 남겼다.


▶전국 230개 기초단체장 중 비리와 뇌물수수 등의 혐의로 기소된 단체장은 41%인 94명에 이른다. 이는 민선 1기 23명, 2기 59명, 3기 78명에서 크게 늘어난 수치다. 이들 때문에 들어간 재보선 비용만 작년까지 480여억 원이다. 전남 해남군수는 1억 9000만 원, 여주군수는 공천헌금 2억 원을 건네려다 현행범으로 붙잡혔다. ‘통 큰’ 당진군수는 수억 원대의 별장과 아파트를 뇌물로 받았다. 군포시장, 통영시장, 영양군수, 옥천군수도 ‘양상군자’였다. 일단 당선 가능성만 높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공천장을 주면 안되는 이유다. 또한 유권자도 ‘알지도, 알려고도 하지 않고’ 무턱대고 뽑아서는 안 된다. 한 순간의 방심과 무관심으로 인해 어찌 4년을 또 ‘눈물’ 흘릴 것인가.

Posted by 나재필